<!-BY_DAUM->
1,우수 날에
최영희
우수 날
요란한
새 소리
내게 다시 봄이 왔음을 알리려
함이려니
뽀릉, 뽀릉, 뽀르릉
사랑스러운,
그래, 너는 봄 문을 열고
나는 詩門을 열어보자,
2, 진달래
최영희
소백산이 줄달음치다
툭 떨구고 갔다는 두악산
봄이면 두악 산자락
진달래
내 가슴 젖도록 피었네
산은 분홍빛
나는 진달래가 좋았네
이 산 저 산
슬픔을 피워 좋았네
그리움 피워 좋았네
봄이면 봄마다
산마다 들마다
진달래 피기 시작하면
가슴은 다시 젖네
내 어린
진달래꽃물로.
3, 내 생(生)이 꽃이었다면
최영희
내 생(生)이 꽃이었다면
들에 산에 피는
풀꽃이었을 게다
스치는 바람도 구름도
사랑인 줄 알고
방긋이 웃는
산(山) 냄새 풀 냄새 풀풀 나는
풀꽃이었을 게다.
4, 봄
최영희
아름다운 나의 사랑
봄아!
나는 이리 나이 들어 늙어 가는데
봄아,
내 사랑 봄아!
넌 변하지 않고 올해도 꽃으로 오는구나
이른 봄 고향 집 언덕
친구들과 도란도란
냉이, 쑥, 다래 순을 뜯으며
햇살 한 줌, 바람 한 줌, 수다 한 줌
소쿠리에 가득가득 채워 맞던
어여쁜 봄아!
넌 그대로인데
우리들 그때 그 모습은 어디에서 찾을까
5, 바람 분다
최영희
바람이 분다
목련 꽃 벙그는 서울의 담장 밑
열 여덟 내 친구 순이야!
아직은 차가운 3월의 연두빛 바람
우리들 함께한 그때 그 언덕
묻어 둔 추억은 실어서 넘었겠지
봄은 오는데
무심히 스치는 사람, 사람들
누구라도 좋다
등에 대고 “순이야!” 하고
불러보고 싶은 날이다
이 바람 부는 날은.
6, 엉뚱한 상상(想像)
최영희
우리 아파트 어린이 집
미끄럼틀 기둥을 타고 오르던 수세미
덤불 숲을 이루고
노란 꽃잎마다 맺힌 수줍음
아이들 눈이 닿으면
“부끄러워요, 부끄러워요”
바람에 산들거리던 꽃잎
꼬맹이들 모르게
통정(通情)을 했었나 보다
달빛이었을까?
초록 치마폭 밑
큼지막하게
아들 하나 키웠네
아이들이 엄마 치마 폭 들치듯
수세미 치마 폭을 들쳐 대는데
내 얼굴이 왜 붉어질까
7, 추억의 러브송
최영희
나 찾아봐라
뚜-뚜- 뚜-
통신두절
나, 꽃 속에 숨었다
풀숲에 숨었다
오빠야, 언니야!
나 찾아봐라
8, 마중 길
최영희
누가 오시나 보다
개나리 노랗게 길섶을 지키고
목련은
가지마다
뽀얀 등불
서둘러 밝히누나
아무래도
봄 오는
이 길을 따라
누가 오시나 보다.
9, 긍정의 계절
최영희
꽃이 피어나는 꽃길을 걸으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사랑하는 이 있는 것 같다
걸어온 길 고단하고 슬퍼도
꽃이 피어나는 길을 걸으면
누군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축복하는 이 있는 것 같다
산에 들에
누군가 오색의 꽃을 피우고
새는 노래를 하고,
꽃이 피어나는 이 긍정의 계절엔
내가 세상을 향해 사랑한다고 말하면
세상은 다시 나를 향해
사랑한다고 화답할 것만 같다.
10, 토끼풀(꽃) 밭에서
최영희
어디고 지천으로 피어도 지천 받지 않는 꽃 토끼풀(꽃), 너무 가까이 있어 늘 그렇고 그런 꽃 그래도 길섶마다
너를 보면 쪼그리고 앉아 말을 걸어보고 싶은 풀(꽃) 오래전부터의 친구 같은 풀(꽃) 나는 오늘도 길을 걸었어.
어디에선지 나도 모를 향기가 나의 온 후각을 잡아당기는 거야. 이팝나무 하얀 꽃일까, 노오란 애기똥풀 꽃,
진달래? 아니야, 아니야, 난 한참을 두리번거렸어. 잡초 속 너의 그 소박한 푸르름으로 나의 시선이 갈 때쯤
그때나 지금이나 삐쭉-이 밀어 올린 촌스런, 그래서 내겐 더 예쁜 꽃, “세상 사람들 행복하세요, 사노라면
더러는 덤으로 행운도 올 수 있어요.” 세상을 향한 절절한 작은 꽃(잎)의 노래
아- 네게서 나는 향기였던 것을,,,
11, 숲 속의 성찬
최영희
내가 갔을 적
숲은, 들어가는 모든 통로를 열어 두었다
소나무도 떡갈나무도 산 벚나무도
언제나 그곳을 지키는
자연인처럼 편안히 나를 맞는다
평상처럼 펼쳐진 자연의 침상
잠시 머물다 간 누군가의 식지 않은 채취가
아직은 촉촉하다
바로 머리 위 푸드덕거리는 새들은
초록을 입에 물고
솔잎에 흔들리는 바람은 물이 들어 푸르다
간이의자 옆에 차려진
간간이 스미는 햇살 한 줌, 바람 한 줌
그리고 푸르름 한 줌
숲 속의 성찬이다
아-, 난 하얀 접시 위
바람이 되고 새가 되고.
12, 좀 가난한 풍경이면 어떠랴
최영희
도심 속 외진 곳
옹기종기 풀들이 모여 있다
나는 가끔 친구 집을 찾듯 이곳을 찾는다
소박한 저들의 늦은 만찬
좀 화려하지 않으면 어떠랴
토끼풀은 토끼풀대로 쑥부쟁이는 쑥부쟁이대로
나름으로 푸르고 꽃도 피웠다
푸른 잎 사이로 꽃잎 사이로
저들만의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도시 한쪽 그들만의 세계
소박하면 소박한대로 가볍게 몸을 흔들며
간혹 웃음소리도 들리는 것 같다
좋은 시 한 수 건지지 못하는
변변치 못한 시인이 즐겨 겨우 찾는,
좀 가난한 풍경이면 어떠랴
이 오붓한 평화로움
나는 가끔 친구 집을 찾듯 이곳을 찾는다.
13, 동행(同行)
-버스 안에서-
최영희
나, 그리고 어디에선가
만난 적 있는 것만 같은 내 곁의 그대들
가는 길 내리는 정거장 달라도
우리는 한 시대에 나
지구라는 별에 함께 탑승한
참 좋은 인연이구나
지나던 구름은 손을 흔들어 반겨주고
멀리 천 년의 산과 들
주인처럼 우리를 맞고 보내는구나
오늘 우리가 지나는 길가엔
신神의 배려일까
꽃을 든 아기 꽃나무 미소도 참 곱다
창 밖, 하늘이 참 맑은 날이었다.
14, 모르고 있었다
최영희
내가 잠든 시간에도
세상은 가고 있다는 것
나는 모르고 있었다
그때 그 목련이 지면서 진달래 피고
진달래 지면서 장미가 피고
장미가 지면서
잎이 푸르고
잎이 지면서
내가 지고 있는 걸
나는 모르고 있었다.
15, 돈나무
최영희
지난해 어떤 지인이 한 生을 살아도
궁해 보였던지
돈(錢)이 열린다는 돈나무를 선물했다
돈이 열린다는 돈나무
나는 이제부터 나의 정원에
동화의 동산을 만든다
동화의 나라 나무 가꾸듯
물길도 내 주고
바람 길도 내 주고
양지 곁,
돈이 주렁주렁 열리는
꿈만 꾸면 되는 거다
나의 꿈은 오늘도 계속 되고
돈은 언제쯤 열릴까
잎만 청청하다, 우리 집
저 고고(孤高)한 돈나무.
16, 봄날 아침에
최영희
개나리 진달래
입술 톡, 톡 부르트고
새들은 이른 아침
숲 사이를 오가며 조잘대는데
아 휴~ 조것들
귀 간지러 살것나
서둘자, 서둘자
봄 오신다, 오신다
산 넘었다, 마을 입구까지다
나무마다 잎도 달고
햇살 포장도 치자
문 앞까지 오셨다
쫑알쫑알, 쫑알쫑알
지지배배, 지지배배
아~휴 조것들
서두는 품새가 아마 그런 소리지 싶다.
17, 봄바람
최영희
봄바람은
분홍빛이다
살~랑 살~랑
꼬리가 달렸다
봄바람은
바람난 예쁜 여자다
사랑하고 싶은 게다
임도 보고 꽃도 보고
나무에도 안겨보고
산, 들, 바다
오늘은 어디를 갈까
살~랑 살~랑
사랑하고 싶은 거다.
18, 여름 밤 이야기
- 피서지에서-
최영희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다
물 위에 집 한 채 띄우고
이렇게 잠재우고 나면
그리움도 사랑도
평온한 것을,
이제 어린 물고기들도
내 품에 잠든
손자들처럼
별들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에
잠들었을 게다
더는 그리운 무언가를 찾아 떠나지 말자
여름밤 별과 달
나를 노 저어 간다.
19, 야시장이 서던 날
최영희
우리 아파트 단지는 일 년에 한 번 정도 야시장을 연다
야시장이 들어오면 자정이 넘도록 갖가지 물품을 펼쳐놓고
어른 아이, 모두 함께 아이가 된다
해가 지면 하나 둘 하늘의 별을 따다 매다는 듯
전구마다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번쩍번쩍, 윙윙 돌아가는 하늘 자동차
나는 지금 무의식 속 잠재된 세상 속으로 날아가는 중이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세상은 동화의 나라 같기도 하고
오가는 이들 걸리버의 소인국 사람들 같기도 하다
오늘은 모두가 별나라 사람이 된다, 풍경 속 같은
나는 늦도록 별을 헤기도 하고 별이 되기도 하다가
모처럼 소녀처럼 부푼 잠에 들었다, 꿈 같은 밤이었다.
20, 오늘은 가슴이 따듯하다
최영희
강화 어느 폐교를
전시장으로 한
도예가의 전시장
오밀조밀 아기자기
정情이 가는
부엌간 그릇들
주발, 종지, 보시기,,,
난 그릇이 아닌 옛날을 샀다
못생긴 듯 투박한 밥 주발
오늘은 이 주발에
한술 밥을 뜨고 물을 부어
된장에 풋고추 하나로
배를 불려 보리라,
21, 징검다리
최영희
내가 사는 서울에도
마을과 마을 사이
징검다리 놓였다
촬찰찰 흐르는 물소리
돌다리
하나하나 건너면
소 몰고 가신 논갈이 순이 아버지도 만날 것 같고
지게 목발 두드리며 구성진 노랫가락
뽑아내던 옆집 그 오빠도 만날 것 같다
저 돌다리
하나하나를 건너면
온 마을이 한 가족 같던
전설 같은 내 안의 그 마을
닿을 성 싶다.
22, 별과 나와의 이야기
최영희
밤사이
지상의 꽃이 되었을까
어릴 적 밤 깊도록
너는 감나무 가지에
나는 초가집 창을 열고
엄마 이야기도 하고 언니 이야기도 나누던
아기별들,
도시에 꼭꼭 숨은 내가 궁금했나 보다
나, 지나는 길섶에
보랏빛 꽃이 된 게야, 청 보랏빛
사노라 잊었구나
그리우면,
그리우면
별이 되고 꽃이 되는 것을,
23, 나는 가끔 사랑 때문에 운 적이 있다
최영희
나는 가끔 사랑 때문에 운 적이 있다
사랑하면서도
보내야 했던 사람들
그들의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나는 지금도 가끔 사랑 때문에 눈물이 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생각하면 가끔은 눈물이 난다
생(生)의 숙제 같은,
풀고 풀어도 다 풀지 못하고 갈
신(神)이 내 심장에 심어 준
사과 속 까만 씨앗의 비밀 같은
동그란, 사랑
나는 아무래도 언젠가는 다시
그, 사랑 때문에 울어야 할 것 같다.
24, 달맞이꽃
최영희
여름밤
강원도 산골짝
달맞이꽃
전설의 바다를 이루고 있어요
호수처럼 고요한
달빛 아래
별빛을 뿌려 놓은 듯
사연 사연들
지천을 이루었어요
닿을 수 없는 그리움
하늘과 땅이
너무 멀어요
강원도 여름밤은
노오-란 전설의 바다가
달빛에 그렇게 젖고 있었어요.
25, 모과 두 개
최영희
재래시장 가던 날
모과 두 개를 샀다
모두 한 나무에 난 형제들일까
그놈이 그놈 같다
집으로 와 두 놈을
나란히 놓아 주었다
두 놈의 배꼽을 보니 닮아 있었다
배꼽의 물기도 마르지 않은걸 보니
아직은 어미 생각이 나겠다
그래도 두 놈 나란히 놓아두니
보기에 좋다.
26, 무나무 마을
최영희
경북 안동 와룡면 무나무 마을
93살 아버지 70여 살의 세 딸
홀로 된 아버지를 봉양하려
도시의 가족을 떠나
굽이굽이 무나무 마을 세 딸이 모였다
낮에는 벌을 치고 쟁기 끌고
밤이면,
아버지 앞에 모여 앉아 노래하고 춤추며
재롱을 부린다, 철부지 딸이 된다
“무나무 마을엔 꽃이 피고
아버지 사랑이 있다.” 딸들이
아버지 앞에서 부르는 작사한 노래다
다리 굽고 허리 굽은 딸들의 재롱
아버지 얼굴엔 웃음이 가득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아무나 할 수 없는 일
오늘도 아버지가 웃었다
무나무 마을 아카시아 꽃길을 걷는
노래하는 일흔여 살의 행복한 소녀들,,,
27, 가족사진 속 우리 엄마
최영희
누렇게 빛바랜
가족사진 속
우리 엄마
바싹 마른 풀잎처럼
잘못하면
부서지겠네
지구 상 북상리라는
산 골짝
그곳이 전부인 줄 알고
한 귀퉁이
들풀처럼
잠시 피었다 간 삶
여기 한 장
사진 속
그 흔적 남겼습니다
나그네
숙박부 흔적 같은.
28,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름
최영희
내가 부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름은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입니다
어느 하늘에 별로 있다
이 세상에 내려와
나를 있게 하고
사랑한다, 사랑한다
어여쁘다, 어여쁘다
어르고 어르시다
짧은 날 서산에 지는 해처럼
서둘러 산을 넘고
그 모습 볼 수가 없네
가슴으로 부르는 소리는 들으실까
내가 부르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름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29, 무제(無題)
설백 최영희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슬프다
풀이 그렇고
꽃이 그렇고
새가 그렇고
강아지가 그렇고
내가 그렇고
목숨이 있어 슬프다
살아가는 길이 고단하고
외롭고 아프고 두렵고
그리움도 사랑도
살아,
느낄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슬프다
누군가 있다가
사라진 자리에 서보면.
30, 감사한 밥상
최영희
박봉에 삼 남매의
가난한 어미가 잘할 수 있는 건
된장찌개 맛내는 것밖에 몰랐다
연탄불 위 뚝배기에서
멸치 몇 마리 바다 맛을 우리는 동안
된장 한술 넉넉히 풀고
무 몇 조각, 애호박, 두부, 그리고
청양고추, 대파를 송송 썰어
김치 한 보시기와
밥상 중앙에 끓는 채 올려놓으면
감사한 밥상이었다
아이들은 소시지 볶음을
좋아하는 눈치였지만
어미는 세 때에 한때는
된장찌개를 열심히 끓였다
앉은뱅이 밥상에
빙- 둘러앉은 다섯 숟가락
척척-, 된장 뚝배기 속에서의 부딪힘
가난한 우리 집 가족애의 끈끈함
거기서부터였나 보다.
31, 빨간 자전거
최영희
빨간 자전거의
열두어 살쯤 단발머리 아이가
트랙을 돌고 있다
아이는 후후 휘파람을 부는듯하다
아마, 푸른빛 소리지 싶다
새 소리도 들린다
바람 소리도 들린다
빨간 자전거는 쉬지 않고
트랙을 돌고 있다
따라가던 햇살
물이 들고
그사이 내 머리 위에 꽃잎이
여러 번 졌나 보다
내가 저 사랑스러운 빨간 자전거를 쫓아
트랙을 도는 동안이었지 싶다.
31, 풍경 하나
최영희
오월의 한낮이
에덴의 그 동산같이 평화롭다
멀리 유모차를 밀고 가는 젊은 엄마
노란 모자에
노란 가방을 멘 아이의 손을 잡은 여인
언젠가 잡아본 어머니의 그 손이다
꼭- 잡은 손안에 사랑이 가득하다
아-, 저 아름다운 풍경
평화가 가득하다.
32, 냉이꽃밭
최영희
어린 순 여린 뿌리
착한 봄 아씨들 까치발 들고
가시는 임, 보내고, 보내고,,,
가시고
꽃을 피웠네
뿌- - 연
바람도 비켜가네
스치기만 해도
풀-석, 주저앉을 것만 같은
냉이꽃밭
모두가 사랑해야 할 오월은
푸르러 오는데.
33, 여자
최영희
여자의 몸은 조그만 우주
지금, 그 세상엔 별이 있고
은하수 물그림자처럼 수를 놓는
한 생명체(아기)의 세계가 있다
오물오물 맛난 걸 먹나 보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그 세계 속에서의 별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도 하고
참, 행복해 보인다
그러나 말이 없다
입만 벙긋벙긋 그냥 웃는다
그 세계에서의 일은
영원한 비밀
여자는 이제 우주보다 큰
어머니가 된다.
34, 그 섬
- 동백섬, 지심도(只心島)- //최영희
장승포 앞바다
동백섬 지심도(只心島)
내가 갔을 적 총인구가 33명이라는 작은 섬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섬이 마음 心자를 닮아 지심도라는데
섬이 온통 동백나무로 숲을 이루어
동백섬이라는데
12월 초부터 동백꽃이 피기 시작하면
3월쯤이면 섬은 온통
붉은 꽃 섬이 된다는데, 그리움인지 슬픔인지 모르겠다
동백섬에는 사람 사는 이야기보다 동백꽃 이야기가 더 많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동백나무 아래 집을 짓고
아이를 낳으면 아이는 새처럼 나는 연습을 한다
새처럼 날기를 바라다 끝내 바다를 날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린다
새처럼 날아간 아이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은 나면 가고 다시 나면 가고
떠나는 자는 모른다, 보내고 남은 자의 쓸쓸함이 얼마나 큰지
동백은 파도 소리로 설움 달래고
지나다 들리는 바람에 외로움 실어 육지로 보내고 보낸다
그래도 아직은 밤이면 근근이 몇몇 불 밝히는 집이 있어
백 년, 이백 년 긴긴 세월 칠흑 같은 밤 죽을 만치 외롭지만은 않았다
꽃을 피울 수 있었다, 동백섬에 가보라 섬에 올라보면
사람 사는 이야기보다 동백꽃 이야기가 많다
내가 갔을 적에도 섬은 동백 이야기로 온통 붉어 있었다.
35, 산을 찾는 사람들
최영희
나는 오늘도 산을 찾는다
봉원사 절 뒤를 돌아 조금만 오르면
정상에는 제4호 봉수대가
선조들의 자취를 느끼게 한다
봉수대를 끼고 돌면
멀리는 남산에서 한강까지
한눈에 든다
남산 밑엔 옛말로 4대문 안
조금만 눈 돌리면
신작로 같은 한강을 끼고
63빌딩, 여의도 국회의사당
그리고 군데군데 무리 지은
고층 아파트
우리는 지금
21세기 문턱에 서서
변화된 서울을
한 장의 그림으로 본다
산 중턱 쉼터에는
출근하는 노인장들
그들이 만들어낸 저 도시 속에는
정작 그들은 몸 둘 곳 없어
밀려 밀려 산 중턱에 사랑방 차리고
멀리 보이는 한강의 물줄기 따라,
바람 따라
그들의 오늘이
뉘엿뉘엿 산을 넘는다.
36, 당신은 누구십니까
최영희
당신은 누구십니까
아-, 나를 사랑하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이 땅에 태어나
한 포기 풀잎처럼 살아도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 속에서 꿈을 꾸게 하는
하늘, 땅, 바람, 산, 들, 그리고 바다, 태양
모두가 나를 위해 있는 것 같게만 하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가슴 모두를 내어 주시며
살아라, 평안하라, 행복하라
이 땅에 태어나게 허락하시고
들에 산에 내가 노력한 만치
풀을 뜯는 사슴처럼 살라시는
당신은,
아-, 참 좋은 당신은 누구십니까
37, 내장산 단풍
최영희
한 마을에 나서 자랐다는
내장산 단풍나무와 단풍나무
봄부터 바라보는 눈빛이
다르다는 소문이더니
온 산이 타들도록 가슴 가슴이 붉다
드디어 혼인을 하나보다
거한 잔치를 하나보다
전국 방방곡곡 손(客)을 부른다
며칠째라는 소문이다
몇 날 며칠 객(客)이 줄을 잇는다
붉게 타오르는 단풍나무들
객(客)들의 환호 속에
신방을 지키는 백말(白馬)들 여기저기 탄성이다
시인이야 타오르라 타오르라
활활 타오르라,
진정한 가슴으로
시(詩) 한 수 읊어주는 일밖에.
36, 풍경, 들다
최영희
마음속 잊히지 않는 그곳
돌아온다는 건 돌아간다는 건
눈물 나는 일인가 보다
가을 그 속
달리는 차창 밖
잡목 숲 사이 얼기설기 잔가지들
울컥, 눈물이 난다
끝내 풀어내지 못한
그리움의 잔영들일까
도시를 벗어난 풍경 밖
내가 가고 계절이 가고
언제 보아도 평온한
산, 들, 바람, 하늘, 구름
아- 그리고 누워도 좋을 저 언덕
언제나 나의 푸른 고향이었지
저물어 가는 늦가을 저만치
시린 빛 속으로, 절름절름
가여운 내 어머니 아버지 걸어가시고
그 안에 자라지 못한 내가 있구나.
39,달 그림자
설백 최영희
달도 가끔은
슬픈 춤을 춘다는 걸 알았습니다
삶에 취해 현란하던 도시
잠이 든 삼경(三更)
거울 같은 유리창 앞에서
나뭇잎 사이
천 년 전부터의 그리움일까
홀로 춤을 추는
달 그림자를 보고 있습니다
달도 외로울 때는
혼자 저렇게 춤을 춘다지요.
40, 가을의 詩
최영희
저 허허(虛虛)한 공간에
한 수씩 적어 내는 가을의 무언의 시(詩)
나는 가을만치 시를 쓸 수 없어
가을 내내 필(筆)을 들지 못했다
가을이 써내는 묵언의 서정(抒情)
하늘 가운데 구름 한 점이 임의 허허(虛虛)함이라면
나는 ( ,,,, )표로 대신할까
어제 지나온 하얀 갈대 숲길이
떠나는 임의 아쉬움을 말하는
무언의 손짓 같은 것이라면
나는 다시 맹목으로 기다림을 결심하겠지
그렇게 한 걸음씩 임은 가시고
이제 은행잎 노란 나비떼처럼 날아 내리면
가으내 앓았던 임의 앙상한 갈비뼈만
다시 나를 슬프게 하겠거니
아- 저 허허(虛虛)한 공간에 가을이 썼다가 지우는,
그리고 다시 쓰는 절절한 언어
그리고 말없이 떠나는,,, 계절의 시성(詩聖), 가을
나는 가을처럼 사랑하고도
가을처럼은 시(詩)를 쓸 수 없음이라
가을 내내 필(筆)을 들었다 놓기를 거듭하고 있구나.
41, 시월의 연가(戀歌)
최영희
시월엔 모두가 떠난다
거리에 자동차도
하늘에 구름도
어딘가 다시 미지의 세계로,
사랑하고 사랑한 거리
익은 열매 같은
애틋한 추억 하나씩 남기고
낯선 거리 낯선 곳
사랑 찾아 떠난다.
42, 가는 길
최영희
난, 사랑하므로 이 길을 왔다
아-, 사랑을 주고
사랑을 받고
어느 곳에선가는
한없이 머물고 싶었다
시간도 공간도
그대로 멈추었으면 했다
바람은 따스하고
햇살은 맑고
꽃이 피고
산은 푸르고,
나는 오늘도 저 너른 들판의
시간의 층계 같은
바람의 가닥과
애틋한 추억 같은
작은 풀꽃을 세면서
이 길을 간다.
43, 억새꽃을 노래한다
최영희
지나는 길
낮은 언덕이었지 싶습니다
산, 들, 바다
한 해 동안의 모든 생각이 누워 잠이 드는데
끝내 스러지지 못하는 소리 없는 하얀 빛 목 울림
눕지도 주저앉지도 못하는
억새꽃 당신을 보았습니다
바람에 너풀거리는 여인의 치맛자락 같은
고요한 슬픔을 보았습니다
고개를 숙이려는 듯하다
가끔은 바람 따라 먼 산을 바라보는
산은 빈 산으로 비어가고
그리움은 영원한 것
사랑은 슬프게도 영원한 것
먼 훗날 우리 떠난 후에도
그곳에 그대로 영원할 것 같은
산을 밟고선 억새꽃 그대 그림자 사이로
천 년의 그리움을 보았습니다
또 하나 지상의 별자리 같은.
44, 11월, 은행나무 길
최영희
조용조용한 음성으로 풀어내는
어느 심성 고운 여인의
생(生의) 이야기를 듣는
11월, 황금빛 은행나무 길을 걷는다
책갈피를 넘기듯 여인은
다음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이야기
조용히 길 위로 내려놓는다
이것은 꿈이요, 이것은 희망이었어요
그리고 이것은 환희요, 이것은 슬픔이었어요
이야기 하나 하나가,,, 아름답지 않은가
11월 늦은 가을날
은행나무 길을 가 보라
조용조용 책갈피를 넘기듯 이야기를 하다
다음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이야기 조용히 길 위로 내려놓는
고운 여인이 있다.
45, 그대들도 그렇지야?
최영희
난, 조국을 위해 무엇을 했노
이 거대한 5천 년 조국에
거룩하게 맨몸으로 던져졌을 때
그래도 큰 소리로 울었제?
이 땅에 딸로 태어난 것이
벅차서 그랬을 것이다
그리고, 그리고 난 무엇을 했노
가난한 어머니 손을 잡고 일곱 살을
에덴의 동산인 양 걸었을 것이다
아-, 하늘이여, 땅이여, 조국이여!
그리고, 그리고,,, 반백 년을
우리 민족의 하얀 적삼이 얼마나 좋은지
영글어 가는 칠팔월 머루 다래가 얼마나 좋은지
이른 아침 어뎌~ 어뎌~ 이랴~ 이랴~아
순한 소의 눈과 아비의 착한 음성
얼마나 좋은지, 얼마나 얼마나, 좋은지
번창하라, 번창하라
忠의 아들을 낳고 孝의 딸을 낳고
산수유처럼 붉은 가슴으로
까맣게 타들도록 사랑하고 갈
이 땅, 이 하늘, 산, 들, 바람, 그리고, 그리고,,,
향기로운 흙이여!
아-, 민중의 꽃, 촛불을 든
그대들도 그렇지야?
43, 46, 북소리
최영희
둥-
둥-
光
.
化
.
門
제모습 제자리 찾는 날
둥-! 둥-! 북소리
가슴을 텅! 텅! 친다
일제, 그들은 얼마나 간교하고 잔인하고
몰염치하고 치밀했던가
대한의 정기를 끓으려
궁궐의 대문까지 옮긴 자들
보이는가!
반만 년 흘러온 그리고 억에 억 년을 흘러갈
민족의 정기가
밟는다고 밟히기만 했겠는가
끓는다고 끓기겠는가
들리는가!
들어 보시라
둥-! 둥-! 둥-! 둥-!
언제나 뜨거운, 그리고 뜨거울
대한의 저 심장 소리.
4447, 6월, 장미 숲을 지나며
-6.25 발발 60주년을 맞아- 최영희
유월에, 유월에
넝쿨 진 장미 숲
조국을 위해 숨져간 영령들의 넋일까
장미꽃 송이송이 뜨겁고 붉다
임들이 지켜낸
우뚝우뚝 솟아오른
우리들 조국의 모습
그러나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전쟁의 그림자
유월이 슬프다
6.25 발발 60주년
반세기가 훌쩍 지나
다른 세상인 듯한 세상
담장마다 붉게, 붉게 피어난
6월의 장미 꽃이여!
어머니일까 누이일까
그 때 그 포화 속
조국 산천 어디선가
가슴에, 가슴에
임들이 불렀을
마지막 그 이름처럼 붉다.
4248, 2010년의 봄
-천천안함 용사들을 떠나 보내던 날-
최영희
사랑하는 임들이시여
이제 모든 수고 내려놓으시고
편히 가옵소서
채 피우지 못하고 가시는
영정 속 저 꽃다운 얼굴, 얼굴들
오늘은 가족들의 오열 속
우리 모두 함께 울었습니다
누가 평화로웠을 이 봄을
슬픔으로 가득하게 했습니까
아들아~, 아들아~를 부르는
저 애통한 어머니, 그리고
남편의 영정 앞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내는
만삭의 저 여인은 어찌합니까
아직 죽음이 무엇인지도 채 알지도 못하는
아빠를 잃은 저 어린것들
또 어찌합니까, 어찌해야 합니까
이 봄날에,
봄날에 꽃잎처럼 져간
46 천안함의 용사勇士들이여!
이제 하늘나라에서 평안하소서
그대들이 목숨 바쳐 사랑한
조국의 이름으로 영광 누리소서!
49, 오늘은 당신이 무척 그립습니다
-조국의 안녕을 바라며-
최영희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라고 노래한
이 땅과 하늘, 그리고 우리 가슴에 영원할
당신이, 오늘은
무척 그립습니다
오월의 타는 듯한 장미담장을 돌아오는데
그 뒤에 숨은 그림자
소리 없는 통곡으로 가슴을 적십니다
아- 하늘은 맑고 바람은 사랑스러운데
어디서 들려오는 슬픈 노래입니까
누웠던 풀잎도 벌떡 이러나
희망을 노래하는 오월입니다
아- 내가 나고 죽도록 사랑하고 갈
이 땅, 그리고 하늘이여!
이 작은 가슴으로
벅차게, 벅차게 사모(思慕)한
장밋빛보다 붉었을
당신의 뜨거운 심장
오늘은 저 붉은 장미꽃잎 사이로
당신이 무척 그리운 날입니다.
50, 지금 저 겨울 숲에서는
최영희
지금 아득해 보이는
저 겨울 숲 속에서는
나무와 나무 사이
바위와 바위 사이
마른 풀잎과 풀잎 사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의 사이 사이에는
수런수런
봄을 기다리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아- 드디어 오늘은
눈이 온단다
하늘 이야기 가득 담긴 눈이 온단다
창 밖
멀리 보이는 저 십자 탑 위에
눈이 내리면,
하얀 눈이 내리면
목이 잠긴 산새들은 마른 목을 추기고
봄을 기다리는
모든 소망의 마음에 꽃이 피겠다.
51, 눈 오는 풍경
최영희
하늘에서 눈이 오네
다독다독 이불 끌어 덮어주던 어머니 손길처럼
하늘에서 눈이 와
온- 세상
하얀 눈 이불 덮어주네
하늘에서 어머니 사랑처럼
눈이 내리네
욕구불만 아이를 달래듯
토닥토닥 등을 두드리며
폭신폭신한 눈 이불 덮어주네
왁자지껄하던 거리도 집도 자동차도
금세 잠든 듯 고요하고
마술에 걸린 듯 요동도 못 하네
어머니 손길 같은 고요함
세상이 온통 쌔근쌔근 잠이 든
착한 아가의 얼굴처럼 평온하네
아- 나도 저 포근포근한
사랑의 마술에 걸리고 싶어라
눈맞으러 가야겠네.
52, 12월
최영희
12월은 신(神)이 준비한
새 손(客)을 기다리는
말끔히 정리된
숙박 집 풍경이다
봄내 여름내 가을 내내
산, 들, 바다, 그리고 거리를 메우던
손(客)들
어느 곳
다시 꿈을 꾸고 있을까
어느 보이지 않는 부지런한 손(手)
한바탕의 삶의 흔적
말끔히 지우고
오늘은 하얀 눈이 내린다
신(神)이 주시는
백지의 세상
“자- 여기에 다시 멋진 삶 그려 봐”
새 삶을 기다리는
12월의 마음은 청정일 게다.
53, 경계심
최영희
시장엘 가
갯 조갤 샀다
잘 씻어 해금 빼려
맑은 물에 담갔다
조개는
한참을 그렇게
문을 닫고 있다가
얼마가 지나서야
궁금한 듯
한발 한발 아주 조금씩
두리 번 거리며 기어 나온다
손끝으로 살짝 건드려 본다
조개는
몸을 바싹 오므리더니
잽싸게 집으로 몸을 숨긴다
그리곤
좀처럼 문을 열지 않는다
내가
새로 이사 온 이 아파트의 이웃처럼
이웃 아파트의 문은
오늘도 다문 조개 같이
굳게
닫혀있다.
54, 마음이 추우십니까
최영희
누군가 담 너머
감나무 검은 가지에
발그스름한
등 하나 걸어 두었습니다
12월,
마음이 추우십니까
감나무 아래 등불 곁으로 가 볼 일입니다
따스함이 있습니다
가난한 시절
연탄 난로의 따스했던 기억처럼
온기가 스칩니다
감나무 가지에 걸어 둔
등불 하나
올겨울
차가운 도시의 골목 길
저 등불 하나로
견딜 만 하겠습니다.
55, 종소리
- 성탄절 날 -
최영희
가난한 시인의 집
성탄절입니다
찰랑찰랑~ 세 개의 방울을 단
말이 끄는 선물 실은 마차
하얀 눈길을 달려온 것 같습니다
리본을 단 포장지 속
강아지 인형, 손가락 털장갑
손자 손녀의 함박웃음
가난한 시인의 집이라
사랑이야 적겠습니까
행복이야 적겠습니까
창 밖에는 눈이 내리고
말이 끄는 마차
찰랑찰랑~~
사랑을 싣고 왔어요
가난한 시인의 집이라
행복까지야 적겠습니까
56, 분수(分水)
최영희
네게도 분노는 있었구나
흐르면 흐르는 대로
담으면 담는 대로
밑으로, 밑으로만
흐르던 너
네게도 욕망은 있었구나
하늘로 솟고 싶은
하늘을 날고 싶은
그래, 어찌
낮은 자라 낮게만 있으랴
뿜어라, 분노가 있으면
파편 같이 부서져
다시 네 가슴에 박힐지라도
낮은 자라
어찌
낮게만 있으랴.
57, 속보인 여자
-장 내시경 후기-
최영희
최후의 보루인 양
꼭꼭 숨겨둔 속내
어릴 적부터 어머니가 그랬다
여자는 몸도 마음도 조신해야 한다고,
천명(天命)인 줄 알고 살아온
내 나이 이순쯤에
무너지고 말았다
훤히 들여다보이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속으로 피어난 열꽃
더 뜨거워지면,
더 뜨거워지면
스스로 자멸하고 만다는 데야
속 보이고 말았다
피우고 피웠어도
못다 피운 꽃이 있었나 보다
내 나이 이순쯤에.
58, 시인들이여!
최영희
시인들이여!
이 험한 세상에
우리 무엇을 노래해야 합니까
카인의 후예들이 범람하는 세상
형이 아우를
아들이 어머니를
남자가 여자를
어른이 아이를,,,
죽이고 죽임을 당하는 세상
시인들이여!
우리 이 땅에서 자연의 어떤 아름다움만을 노래하겠습니까
우리의 어떤 삶을 노래할 수 있겠습니까
아- 슬픈 세상
어떤 노래로
이 땅의 희망을 노래해야 합니까
원로시인이신, 나의 스승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시인이 있는 세상엔
강도가 없어지고 도둑 없는 세상이 된다고,
“ 사람아 입이 꽃처럼 고아라,
그래야 말도 꽃같이 하리라” 하셨습니다
아- 이 시대 우리 시인들이시여!
우리 어떤 노래로 우리가 사는 이 세상
꽃 같은 마음으로 꽃 같은 말을 주고받는
꽃처럼 아름다운 세상이게 하겠습니까
59, 민들레 핀 땅은 외로운 땅
최영희
혼자 있으면
외로운 것 같고
모여 있어도
방긋,
웃는 얼굴이
더 안쓰러운 꽃
민들레 핀 땅은
외로운 땅
길가에 있어도
풀숲에 있어도
다독이는 손길도 없어
눈길도 없어,
누군가를 그리워해 본 사람은 안다
오지 못할 누군가를 기다려 본 사람은 안다
방긋 웃는 얼굴 속의
쓸쓸한 이야기.
60, 내비게이션
설백 /최영희
참 좋은 세상이다
원하는 어느 곳이든 쿡! 하세요.
친절한 나만의 길 안내자
내비게이션
11시 방향 좌로 2시 방향 우로
열심히 길 안내를 한다
오늘은 지명 란(地名 欄)에 내 유년의
“그리움의 동산”을 부탁해 봐야겠다
앞산 뒷산 참꽃나무
온 산을 두른 듯한
연분홍빛 그리움
청정 별빛 휘감아
머루랑 다래 익는
소백산자락, 하늘 아래 작은 동네
go, go,,, 오늘은 그곳으로 갑시다.
61, 한탄강 고석정(孤石亭)에 올라
최영희
고생대 중생대를 거처
아- 저 기암의 절벽
풍상에 씻기고 깎기고 다듬어져
갖가지 형상으로 섰구나
평강에서 임진강까지 이른다 했던가
기암절벽을 사이로
칭칭 휘돌아 흐르는 한탄강아
북에서 남으로, 남으로
한때는 노래로
한때는 恨으로 흘렀겠어라
저기, 저기쯤에서 일게야, 우리네 할아버지쯤은 되시겠다
남으로 북으로 철원 땅 이 골을 지나는 발자국 소리
시대의 의적 임꺽정이 숨어 지냈다는 고석바위
바위 끝 소나무는 아직 숭숭 푸르고
바람도 구름도 오가는 한 하늘 북녘 땅
난, 선 채로 산 넘어 마음만 오가고
아- 절벽마다 붉디붉은
철쭉이여, 조국을 사랑한 언니처럼 예쁜 꽃이여!
그대, 그리고 나 이 나라 이 땅 함께 사랑하는 마음일레라
언제쯤일까
다시 저 유유한 한탄강 물줄기 따라
이 산 저 산
함께 꽃피고 새 우는 날.
62, 산은 말씀이 없다
최영희
산은
아파도, 아파도
참 과묵도 하시던
내 아버지만큼이나
말씀이 없다
새들이 오면
새를 울게 하고
꽃이 피려면
꽃으로 피게 했다
짐승들이 소리 내 울면
짐승들의 괴성도
순하게 들었다
고단한 자 쉬게 하고
맑은 공기 맑은 물
이 나라, 이 땅
푸르게, 푸르게 묵묵히 지켰다
그러나 21세기 인류문명의 폭거
여기저기 파헤쳐진 산
허리가 잘리고, 뚫리고, 뭉개지고
허-연 피를 흘리고 있다
지금 산이 곳곳 아프다
그러나 산은 말씀이 없다
그때 내 아버지처럼.
63, 빈자리, 그 허전함에 대하여
최영희
난, 기어이
나의 오랜 친구, 그를 보내고 말았네
그의 이름은
듣기만 해도 가슴 설레는
‘진달래’
봄이면 발그스름한, 얼굴
그에게선 언제나 고향의 내음이 나고
고향의 노랫소리가 들렸네
어느 날부터인가
삭막한 도시의 창(窓)이 싫어졌을까
시름에 차 있던 그가 떠나고 말았네
내게 이별이란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겐 슬픈 이별이었네
분홍빛, 그리고 푸른 이야기로 가득하던
창가, 이제 날마다
그때의 그 아침처럼 햇살이 부셔와도
그는 떠나고
내 마음 홀로 서성이겠네
마음 준 누군가가 떠난 빈자리는
늘- 그랬네.
64, 하늘에도 별, 땅에도 별
최영희
도시는 침묵으로 있고
지하철 광장에서 쏟아져 나오는
저 하나하나의 외로운
별들 좀 봐!
나도 결국 저 무수한 별들 가운데
하나의 별
우리 모두는 지하철이나 광장 등에서
서로 이렇게 어깨가 닿고
혹, 눈빛이 마주쳤다 해도
하늘에 별이 그렇듯
어딘가로 흩어져 혼자가 되는
하늘에도 별, 땅에도 별
우리 서로가
외로운 날에는.
65, 광대 춤
최영희
거리 장터 광대들이 춤을 춘다
오늘은 너도 광대 나도 광대
얼굴에 그려진 얼룩진 인생살이
허허- 너털웃음, 그 속에 눈물이 흐른다
들~썩 들~썩 슬픈 어깨
얼-쑤!- 모두모두 춤을 춘다
한바탕 돌아간다
저 멈추지 않는 생(生)의 몸짓이여!
우리네 누군가의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저렇게
춤을 추다 가셨다지
아- 여름날 칸나보다 붉은 가슴 가슴들
어쩌자 저토록 뜨겁단 말인가?
덩~실 덩~실 춤을 추는 광대의
흘러내리는 바지 사이
달랑달랑 엽전 몇 잎,
우리네 인생이 웃는다 운다, 얼-쑤!
이것이 한바탕 사람 사는 세상이라지.
66, 대추나무 골
최영희
내게도 고향은 있소이다
봄이면 창 너머로 하얀 앵두꽃 소복이 피어나고
자고 나면 앞마당 감꽃이 별처럼 쏟아지던 곳
전설을 노래하던 서낭당 느티나무 밑
소백산자락을 돌고 돌아 흐르는 시냇물
그 위를 가로지른 징검다리 위로
찰랑찰랑 발목을 적시던 은빛 물결
봄부터 대추나무 연초록 구름 띠를 두르고
앞산 뒷산 참꽃나무 분홍 물을 들이면
뻐꾸기도 울고 소쩍새도 노래하는
대추나무 골이 내 고향이라오
대추 알갱이 빨긋빨긋 물들어 오는 한가위라
고향집이 거기 오만, 나 혈혈단신이라
어머니 아버지 가시고 반길 이 없는 고향 땅
이제는 가는 길도 잊겠소
대추나무 골 내 고향은 안녕하신지.
67, 내소사에서
최영희
능가산자락에 자리한
내생(來生)의 염원을 담았다는
내소사(來蘇寺)를 가려면
먼저 송진 냄새로 가슴 싸-한
이 전나무 숲을 지나야 한다
전나무 숲 사이로 들리는
아-, 바람 소리 독경소리 천상의 문이 열리고
이제 천 년의 시간은 그림자로 내 안에 드나 보다
대웅전 꽃살문의 꽃들은
바람에 씻긴 채 햇살에 바래인 채 선명하고
마당에 수문장처럼 우뚝한
수령이 천 년이라는 느티나무 한 그루
천 년의 비밀을 안은 듯 바람에 너울너울 푸르다
대웅전 처마 밑을 돌아 나오면
돌 수반 속, 천 년 우주를 담았을까
하늘이 물에 들고 푸른 나무그늘 사이로
연잎 위 동동 수련 한 송이
내생(來生)에 반드시 소생하겠다던
어느 스님의 넋인 양 해맑고
저, 하-얀 연꽃이 세상을 맑히는 우주라면
우주의 중심 같은 노란 꽃술 속에 안긴 벌 한 마리
저놈도 지금 내생을 꿈꾸는 중일까, 잠든 듯 고요하다
사찰을 돌아 나온, 천 년 전에도 천 년 후에도
영원할 바람이여! 바람이여! 천 년 후 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그대 다시 만날까.
* 내소사(來蘇寺)는 ‘내생(다음 세상)에 반드시 소생(蘇生)하겠다. 라는
의미심장한 소망을 담아 건립한 사찰이라 한다.
68, 눈이 내리면
최영희
눈이 내리면
발길이 185Cm쯤 되던
하얀 눈 속의 산토끼 빼알간 눈을 닮은
그때 그 사촌 아우의
눈(目)을,
생각하면, 생각만 하면
내 방으로 난 창 밖 작은 화단의
봄을 기다리는 겨울 장미보다 더 슬프다
그해 겨울
눈(雪)으로 지붕이 소복한
탄광
굴 속
압사한 숙부 생각 때문만은 아니다
겨울 숲을 지나 들려오는
그때 그 숙부 닮은 슬픈 딱따구리 탱탱,
겨울나무 쪼는 소리인가?
눈이 내리면
슬픈 소리의 생각들이
우우-
우- 우우-
산에서 자꾸 들린다
누군가 산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고…
69, 내 고향
최영희
앞산 뒷산
산은 산으로 있고
시냇물은 물길 따라 그대로
흐르는데
이곳저곳
마을, 한 바퀴
멍멍이는 낯선 듯 짖어대고
알아보는 이 없네
내가 나고 자란 내 집은
끝내 버티지를 못하고
돌무지만 흔적으로 남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어머니 아버지
나 부르는 소리,
바람이었나
내 할아버지 심었다는
마당 가 백 년 대추나무만
나 반겨 섰다
어머니 아버지 곁
꽃피고 새우는
아- 마음속 지울 수 없는
영원한 내 어린 고향이여!
70, 서울의 밤
최영희
일상의 모든 것들이
서서히 자리를 뜰 때쯤이면
하나 둘,,,
별들이 찾아든다
어느 세상 어느 곳
별들도 분주했으리라
아침을 보면 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자동차
줄에 줄을 서는 지하철 승강구
뉴스 시간 보도는 늘 뜨겁다
끊이지 않는 세상의 사건 사고
세계 속 서울의 하루
어찌 분주치 않았을까
빛을 쫓던 살아 있는 모든 것들
어둠이 찾아와 누운 듯 편안해 지면
아- 저 평온함,
그제야 나의 착하디착한 별들이
하나 둘 불을 밝힌다.
서문 1장
시집 앞 자리에
시인이
신 작품을 모아
시집을 묶는다는 것은
어제까지 없던 바다에
새 섬이 한 개 솟아나는 것과
같은 기쁨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리라.
최영희시인은 이번 묶는 시집으로 제3의
시집이 되는 것이다
참 근면한 시인이다
깊은 바다 속에서 보석의 날개를
찾듯이 그렇게 시를 찾고 있다
찾은 보석의 날개들은
새로 정돈하는
시의 동산에
수정의 화원이 된다
세상 어느 곳에
시가 솟는 시 샘이 있다고 했다
많은 시인들이
그 시의 샘을 찾아
떠났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 샘을 찾았다는
기별은 지금까지
들은 적이 없다
생각으로는 그 샘을 찾을 시인은
우리 시대에 혹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도 해본다
새 시집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까
내게 그 시집이름을
다음과 같이 정하고 싶다고 했다
<시간의 층계 위에서>
서문 2장
공감이 가는 이름이다
그래 최영희 시인의 제 3시집은
시인이 정하고 싶다는
그대로 정했다
만약 시집 이름을 작품에서
찾으라면
나는 이 시집에 실린 작품 중
빨간 자전거를 고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마음대로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 된다.
내가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어떤 작품이겠느냐고 묻는다면
우선 몇 작품의 이름을 말 할 수
있으리라
<빨간 자전거>
<여자> <지금 저 겨울 숲에서는>
<내장산 단풍><눈이 내리면>
<빈자리 그 허전함에 대하여>
특히 권하고 싶은 작품들이
많이 있다.
권하고 싶은 작품이 많이 담겨
있는 시집이라면 꼭 권하고 싶은
시집이리라.
이 말은 박목월 시인이 남긴
말이다.
최영희 시인에게 내일을 위하여
시 탐구를 하늘에 물으시라.
2011. 8 . 황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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