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희 詩人 시집 작품

[스크랩] 제2시집[또 하나의 섬이 된다](77편) // 제 13회 영랑문학상 수상 시집

詩人 설백/최영희 2009. 8. 6. 07:03

1) 늙은 호박 속을 가르며

최영희

딸아이 해산 부종을 빼려
늙은 호박을 샀다
꼭지를 위로 두고
오분의 사쯤에 칼을 댔다

쩍-,
가르고 나니
벌건 피가 뭉쿨!
솟아오른다, 뜨겁다
한 움큼
물컹한
얽히고설킨 살점을 뜯어내며
어머니 그 속을 보았다

사리처럼

옹이 박힌
여자의
사랑 법
어머니…

늙은 어머니의 그 속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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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풀꽃 연가

최영희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풀은 풀대로 나는 나대로
변할 줄 모르는
풀하고 나는 아무래도
고향이 같은가 봐

도시에 살아도
먼 산 구름만 바라보다
해지면 어머니 품 속 같은 흙이 좋아
흙을 베고 잠에 드는 풀꽃

내 고향은 심심산골 단양
너의 고향은 어디더냐
도시에 몇십 년을 살아도
풀 티,
산골 티를 못 벗는
풀과 나는 아무래도
본래부터 같은 부류였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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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봄날에는

최영희


햇살 화사한
봄날엔
누군가 조그만 화단에 꽃씨를 뿌리 듯
난, 우리 집 마당에
그리움의 나무를 심겠습니다

언덕 너머 아지랑이 피어 오르면
나도 알 수 없는, 누군가를 그리는
내 마음은
꽃으로 피어 날 테지요

사람들은 알까?
그리움 끝없이 이는 날
내 마음속
새끼 노루 한 마리
내가 어릴 적 좋아한
머루 다래 넝쿨 진 산으로,
산으로 가는 걸
누군가가
몹시도 그리워지는 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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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꽃길

최영희


마음이 슬픈 날
꽃들이 어우러진 꽃길을 걷는다
하얀 개망초꽃, 보랏빛 부처꽃, 주홍빛 원추리꽃
방금 핀 듯한 나팔꽃까지 바람에 평화롭다

천사들이 거닐다 간 길 같은 이 꽃길
꽃들은 내게도
환한 미소로 손을 흔들어 준다
신이 우리에게 내려 주신 행복은 참, 공평하다
구하는 자에게 얻어진다
느끼는 자에게 주어진다
마음이 슬픈 날은
우리 모두 꽃길을 걸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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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소백산 진달래

최영희


내 고향 소백산자락
봄마다 피고 지던 진달래꽃이여
지금도 그대로 피고 있느뇨

밤마다 우던 소쩍새 소리
열세 살 내 애간장 녹이고도 남았고
어머니 가신 길 따르지 못해
봄마다 앞산 뒷산
내 그리움처럼 번져가던
분홍빛 진달래꽃 무리들

세월까지 희끗해진 내 나이
추스르지 못한 그리움 끝 자락
내 고향 소백산 그 깊은 산중
아직도 어미 찾던 그때 그 부엉이
먼 산을 울고
무더기, 무더기
진달래
올해도 그대로 피워 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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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제비꽃에 대한 단상(短想)

최영희


이름도 많구나
제비꽃, 오랑캐꽃, 병아리 꽃
그리고 장수 꽃, 외 나물, 씨름 꽃

때로는 예쁘다
때로는 오랑캐다
말, 말, 말 많은 세상
보일 듯 말 듯
키가 작아 더욱 가여운 제비꽃아
세상 사람들 입방아가 싫어
여기 산밑 길섶, 풀숲에
숨어서 피었구나

싫기도 하겠지
깊은 산중
올망졸망
진 보랏빛, 네 얼굴
너의 눈이 눈물로 글썽 하구나

내 오늘은 너의 마음 아픈 이야기
한 소절 듣고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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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봄의 절규

최영희


아픔이 모이면 꽃이 된다던가
절벽 끝에 한 송이
이름 모를 꽃
누구의 아픔 이길래
저토록 매달리어
온몸으로, 온몸으로 절규하는가
빨갛게 피로 물든 꽃잎
한 점 한 점
바위틈에 선혈을 뿌린다
마침내 아픔은
소리 없는 몸부림으로
온 산을 붉게 물들이고
아리도록 아름다운 미소
오가는 이 심장까지 시리게 한다
어느 못다 한 애절한 사랑이 꽃이 되었는가
사랑의,
사랑의 아리아를
저, 골짜기마다 울려 퍼지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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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4월 어느날의 나의 戀歌

최영희


사랑하는 사람이여
나 이제 어디로 갈까요

지금 차창 밖에 있는
산과 나무와 4월의 꽃들에게 안녕을 고하고 떠나 왔어요
아니, 어쩌면 그들이 내게
안녕을 고하고 떠났는지 모르겠어요
백 미러 속 세계가 타인의 세계처럼
점점 멀어져 가고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내가 사랑한 사람들이여
나를 사랑해 준 사람들이여
내 가슴 속 사랑 너무 깊어
울 것만 같은데요
지금도 방금 까지 내가 있던
나의 체온이 채 식지도 않은 그 아늑하던 세계가
자꾸 멀어져 가네요

4월이여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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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동병상련(同病相憐)

최영희


고향 집 작은 언덕배기
하늘 바라기 밭두렁 가
봄내 여름내
영문도 모른 채
분홍 나팔꽃, 나랑 함께
한낮이 좋았지
철없이 좋았지

한강으로 가는
도림 천 뚝방길 따라
세월 같은 어지러운 잡풀 덩굴 속
쭈뼛쭈뼛 고개만 내민
초라하리 만치 분홍빛 작은 네 얼굴
동병상련일까
오늘은 네게서 내 안의 나를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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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사랑하는 일

최영희

사랑하는 일은
꽃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그리나 아름다움만,
그리고 비 오는 날
잎에 흐르는 눈물 같은
빗물만을 보는 게 아닙니다
그 깊숙한 꽃의
마음을 보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나비를 바라보는 일만이 아닙니다
이른 아침
이슬에 젖은 나비의 날개를
맑은 햇살이 그러하듯이
마음으로 안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일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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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은

최영희


내가 사랑한 모든 것은
바람이었습니다

나를 보고 진실처럼 웃어주던 모든 것
사랑하는 어머니가 그랬고
들녘 가는 곳마다
방긋이 웃어주던 꽃이 그랬고
내가 최초에 사랑을 느낄 때쯤
사랑하던 사람이 그랬고
함박눈처럼 폭폭 쏟아지던 우리들의 풋풋한
이야기가 그랬습니다

내 곁을 스치는 모두가
한 점 현실 같은 영상이었다가
바람이었습니다

난 지금도 한 점 바람일 모든 것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내가 기어이 사랑하고 말
봄은,
또 바람으로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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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별

최영희



만나고 헤어짐이
모두 내 일만 같아서
오고 가는 모든 것이
내게 이별을 고하고 가는 것 같아
하늘만 바라봐도
때론, 눈물이 나는 때가 있습니다

아, 벌써 오는 듯하던 봄
떠나려는 기미를 난, 이미 알고 있습니다
스치는 바람
떠가는 구름
말이 없습니다
꽃잎, 한 잎 두 잎
바람 끝에 날고 있습니다
이별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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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가난한 사람들

최영희


시장 좁은 골목
싸-아 한 바다 내음

가난한 사람들
봄을 팔고 있다

바다를 뿌리째 건져 올린
물미역, 파래, 멍게

산이며 들이며
봉긋 봉긋
햇살 한 소쿰, 바람 한 소쿰
그리고 양옆에는 파릇한
쑥 한 소쿠리, 달래, 그리고 냉이 한 소쿠리

달래 사세요
냉이 사세요
아니, 봄 사세요

가난한 사람들
목소리에
봄처럼 물이 올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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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생(生)

최영희

산다는 것은
꿈을 꾸며 별을 헤는 것만은 아니지
산다는 건
지금 이 지하철 안
머리가 하얀 저 두 노인
서로의 시선에 불꽃을 튀기며
폐 신문 등을 다투어 거두게 하는 것이지
차창 밖으론
가을이 지나간 자리
들꽃이 살아 낸 생(生)의
아팠던 숨소리가 들리고
내 가슴에는 아직은 뛰고 있는
심장 소리가 들린다
산다는 건
저 두 노인의 폐 신문걷기의
치열한 경쟁처럼
이 우주 속에 살아남기 위한
무언의 처절한 몸짓은 아닌지
산다는 것은...

2006.11.1 지하철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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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사랑의 그림자

최영희


웃고 있는 꽃을 보셨나요
당신은 늘 웃고 있는 제 얼굴을 본 적이 있나요
어제는 나도 역시 웃고 있는 당신의 얼굴을 보았어요

어느 날인가는
꽃대 밑
나, 그리고 우리의
숨은 그림자를 보았어요

젖어 있었어요
비 오는 날
내 가슴 속 잎이 넓은 후박나무의
젖은 그림자처럼

그것은
우리들의 삶의 빛이었어요
우리들이 그토록 사랑하며 살아온
삶의 그림자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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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나무에 대한 생각

최영희


나무들,
사유의 숲은 언제나 깊다

스친 비바람
나무는 평화롭고
난, 조그만 아주 조그만
나뭇가지 끝에 매달리는
한낱 작은 생각이었다가
때론 나무의 생각을 쪼아 올리는
한 마리 새였다가
또 어느 땐 한 마리 물고기가 된다
아마 수 억년 전엔
바다였을지도 모를
그 바닷속보다 깊은 나무들의
사유의 세계를 헤엄을 치고
나무는 지금도 또 하나의 푸른 생각을
가지 끝에 달아낸다
물빛보다 푸른 나무들의 사유의 숲
들면 들수록 여유로움 가득한 세계
아! 난 오늘은 먼먼 생을
살고 또 살아낸 작은 풀벌레로
저 숲에 들어
지난 생의 그리움까지
가슴으로 품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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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비가 왔어요

최영희


어젯밤 비가 왔어요
그제까지 활짝 웃던 벚꽃
바람이 한 번 나뭇가지를 세차게 흔들고 갔어요
꽃잎이,
더는 날지 못할 젖은 날개의 하얀 나비처럼
날아 내려요

길 위에 더러는 슬픔처럼 빗물이 고였어요
그냥 갈 수 있나요
물 위에 동동
하얀 웃음 조각
띄우고 갔어요
함께 했던
환희의 순간 순간들
동동,
작은 바람에도
긴 파문이 일어요

후회하지 않을 봄날의 사랑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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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그대 날 사랑하거든

최영희

그대 날 사랑하거든
우리 늙어 감을 슬퍼하지 말아요
그대 날 사랑하거든
고왔던 추억만을 그리워 말아요

아름다웠던 추억은
우릴 그리움에 젖게 하고
현재의 우릴 슬프게 해요
그대 진정 날 사랑하거든
현재의 우릴 함께 사랑하도록 해요

장밋빛 같은 사랑도 아름다워요
그러나 자연의 순리를 사랑하며
말없이 피었다 지는 들꽃 같은 사랑은
눈물 나게 아름다워요

그대 정령 날 사랑하거든 슬퍼 말아요
우리 함께 그리, 그리 부는 바람과 별을 사랑하며
고요히 피었다 지는 들꽃 같은
그런 사랑을 하다가요

난, 언제나 현재의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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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내가 지금 시를 쓰고 있는 건

최영희


내가 지금 시를 쓰고 있는 건
어느 시인이 말한 것처럼
난, 전생의 기억을 더듬고 있는 거야
가난한 들녘에
한 남자와 여자가 걸어가고
듬성듬성 흙의 냄새가 지독한
헤진 고무신이 그들의 발끝에 매달려 가고 있어
당나귀 코끝에 달린 쇠 힘줄 같은 동아줄은
당나귀가 아닌 그들의 시간을 어디론가 끌고 갔어
아마, 내 전생도 고놈의 고리에 끌려
그렇게 헤매고 다녔을 거야
내가 지금 시를 쓰고 있는 건
내 전생에 보았던
그 가여운
한 남자와 여자와 같이
그, 시간의 고리에 끌려 헤매 이다
채 갈무리하지 못한
사랑하고 또 사랑한 아픈 기억을
하늘을 나는 새가 허공에 그 발자국을 새기 듯
그렇게 새기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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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풀잎의 노래

최영희

난,
풀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몸짓을
슬픔이라 하지 않겠다
풀잎의 이슬에 젖은 눈빛은
아름다움이라 하겠다
바람이 불어 올 때
그 바람마저도 사랑해야 했듯이
그들도 그러하리라
거센 비바람에 잠시 몸을 누일지라도
다시 일어나리라
그리고 삶을 노래 하리라
우리 그러했듯이
삶은
아름다움이다, 슬픔까지도
풀잎들이
몸으로 부르는
노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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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여름날의 사랑

최영희


발가벗은 채 백사장에 누워
온 몸으로, 온 몸으로
사랑할 걸 그랬지
해바라기처럼
하늘만 바라보며 가슴만 태웠는지
가을이 되고서야,
물들어 가는 나뭇잎을 보고서야
당신의 뜨거웠던 사랑의 의미를 알았지
한줄기 퍼부어대던 소낙비도 식히지 못했던
우리들,
여름날의 사랑
날마다 피고지던 나팔 꽃 넝쿨을 접으며 배인
상처를 보고서야
여름날 우리들의 뜨거웠던 사랑이 지나간
서늘함을 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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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파도

최영희


파도여,
파도여!

일고 일다 부서 질

오~,
넌,
하얀
내 그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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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어느 여름날의 오후

최영희


2006년 어느 여름날 오후
브람스작, 항가리 무곡 3번이
KBS 고향악단의 오케스트라 연주로
잔잔히 흘러 나오고
아직 평화로운 풀벌레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멀리 우뚝 솟은 깃대 위에는
조국의 깃발
하늘은 아직 무겁고
7월은 깊기만 하다
가슴이 뜨거웠던 예전의 친구들이여
우리 무엇을 그토록 사랑 했을까
지금 창 밖에는
하늘을 지나던 새
나뭇잎에 알 수 없는 언어로 미래를 새기고
머리 속엔 혼돈의 바람이 스스로를 어지럽히고 있다
가끔은 흰구름과 검은 구름이 부딪는 천둥소리
아, 오늘
누구라 저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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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한여름 밤의 동침

최영희


내가 그렇게도 좋은 가봐

싫대도, 싫대도
어느새 내 허벅지,
발가락까지 입맞춤했나 봐
난 너(모기)의 사랑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데
여름 밤 내내 너에게 강요당한 동침
재스민 비누향기도 가시기전
지키지 못한 내 순결
아무리 생각해도 분노여라
이 지긋한 한여름 밤의 사랑 전쟁
내 곁에 깊이 잠든
내 사랑 당신은 아시나요
한여름 밤
이 불순한 동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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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오월의 신부
-둘째 며느리에게 주는 글

최영희

나의 사랑 나의 신부야
이제 내가 이랑 일군 꽃밭으로 오렴

긴긴 세월
너를 기다려 양지 곁 나즈막한 울을 치고
열심히 풀을 뽑고 아침저녁 물을 주며
꽃밭을 일구었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야
이제 그 꽃밭에 꽃씨도 뿌리고
장미로 울을 치면 어떨까

해마다 오월이면
붉은 장미 송이송이 너의 사랑처럼 피어나면
난, 이만치 언덕에 올라
네가 하늘에 드리는 감사의 찬가를 들으련다

오-, 나의 사랑 나의 신부야
눈부신 오월이 너를 축복하고 있구나
내내 오늘같이만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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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이 푸른 오월에

최영희


햇살도 푸른 오월엔
사랑하고 싶어라

친구여,
내 사랑하는 친구들이여!
나뭇잎들의 사랑에 겨운 저 몸짓을 보라

저 푸르고 푸른 무언의 함성, 함성,,,

부신 날의 터질듯한 고요함
빛살처럼 우리들 가슴을 가르고

소리 없는 저 푸른 일렁임
우리 젊은 날이 아니어도

친구들이여!
창 밖의 장밋빛마저 저리도 붉은
이 욕정의 오월
사랑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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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5일간의 외출

최영희


한 여자가 의식의 한 가닥을 잡고 있다
울컥울컥 쏟아 낸 것이
설움인지 그리움인지는 모르겠다

멀리 들리는 119 사이렌 소리는
여자의 어느 곳인지 모를
의식 속 먼 길을 돌아오고
여자는 응급실 침상에 뉘어졌다

켜켜이 쌓였던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한 미세한 울림
여자는 그때부터 끝없는 허공 속 바다를 항해한다
노도 없이 떠가는 조각배 한 척이 지나고
바다를 건너던 힘겨운 나비 한 마리
귓속을 윙윙 울어 댄다
끝없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닷길 이랑 따라
의식은 덩실덩실 바다 위를 춤을 추고
한참을 가다 멈춘 그곳
겨우 섬 하나 보인다
흠씬 물에 젖은 그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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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소나기 오는 날

최영희


여름날 소나기 한줄기
목마른 대지를
흠씬 적시고 있다
가을로 가는 길
목마름이야 어찌 대지뿐일까
거스를 수만 있다면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어느 소설 속 주인공처럼
우연히 소나기를 피해 동굴을 찾고
동굴 속 한 줄기 빛에서 처음을 시작하고 싶다

오늘처럼 소나기 한 줄기 쏟아지는 날엔
아득히 먼
처음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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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숲

최영희


숲은
봄도
여름도
가을도
그리고 겨울도

저만치 나의
그리움일 것 같다
기다림일 것 같다
슬픔일 것 같다

내가 외로울 때 슬플 때 달려가
와락-,
안기고 싶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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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8월의 나무에게

최영희


한 줄기
소낙비 지나고
나무가
예전에 나처럼
생각에 잠겨있다

8월의
나무야
하늘이 참 맑구나

철들지,
철들지 마라

그대로,
그대로 푸르러 있어라

내 모르겠다

매미소리는
왜, 저리도
애처롭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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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9월에 부르는 노래

최영희


꽃잎 진 장미넝쿨 아래
빛바랜 빨간 우체통
누군가의 소식이 그리워진다

망초꽃 여름내 바람에 일던
구비 진 저 길을 돌아가면
그리운 그 사람 있을까

9월이 오기 전 먼저 떠난 사람아

지난해 함께 했던
우리들의 잊혀져 가는
그리움의 시간처럼
타오르던 낙엽 타는 냄새가
올가을 또 한 그립지 않은가

가을 오기 전
9월,
9월에 그리운 사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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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가슴에 심은 나무

최영희


사랑이란 이름으로
가슴에
그리움의 나무 한 그루 심었습니다

세월 지나며 그리움도 지병처럼
가슴속 혈관 곳곳 뿌리내려
해마다 봄이면 움이 돋고
여름이면 숲을 이룹니다

내 생에 그토록
하늘, 별, 그리고
가슴 시리도록 불어 내는
휘파람새 소리까지 사랑했을까

울컥울컥
그리움, 그리고 사랑도 병이라
점점 깊어만 가는데

겨울 오름 산
봄은 또 그리
안개빛으로 오는가

한 보습 젖은 땅을 찾는
내 가슴 속 나무처럼
그리움의 젖줄 대는 봄이 오면
난, 또 한 번
심한 열병을 앓아야 하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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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나의 슬픔에게

최영희


이제 나를 위해
슬퍼하지 말기를

고요한 새벽
호수 위를 걸어가는
아침 이슬처럼
비 온 뒤 뒷산을 오르던
구름 안개의 그 고요함처럼
서서히 내게서 사라져 주기를

그래도, 그래도 내가
젖은 풀잎을 보고도 슬프다 하거든
누군가를 못 잊어 슬프다 하거든
하얀 백지 위에 한 줄의 시詩를 쓰고
가슴으로 울게 하기를,,,,

아, 이제라도 사랑하고 싶은
나를 위해서는
슬퍼하지 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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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그림 속의 여자

최영희


한 여자가
낯선 세계 속에
고개를 숙이고 내 그림자처럼 서 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아니 어쩌면 처음인 듯한
풍경화 속 여자

우중충한 고층 빌딩 숲 사이로
잎을 지우는 여인을 닮은 슬픈 장미
울음 빛이 피처럼 붉은데
세상은 슬프도록 아무 동요動搖도 없다
한 폭의 풍경화로 고요할 뿐

난 이만치 에서
그림 속의 여자를 보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
당신도 나처럼 누군가를 사랑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금방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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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꽃과 여자

최영희


우린 지는 꽃을 보고
슬프다 했나요

지하철 노인석
수선화 닮은 할머니 한 분
다소 곳 앉아 있네요
오똑한 코
숲 속 푸른빛보다 깊은 눈
살포시 다문 입술
팔순은 되셨을까
수선화 같은,,,

여자는
질 때도 한 송이 꽃입니다

우린 지는 꽃을 보고 슬프다 했나요
아름다운 꽃은 질 때도 아름답습니다
꽃과 여자의 지는 모습은
슬픔이 아닙니다
모든 사랑을 본래대로 고요히 내려놓는
말없음의 고요함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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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동백나무

최영희


동백섬 동백나무
누군가 그곳에 옮겨 심어
백 년,
해마다
울컥울컥
붉은 꽃 피워 내고
모가지째 툭툭
떨구는 그리움
내 가슴 속
태우지 못한
뜨거운
핏빛만큼 붉어라.

~~~~~~~~~~~~~~~~~~~~~~~~`````

37) 마른 들꽃

최영희


푸른 시간 속
잠시 머무른 이슬처럼 맑고
순한 너의 시간들
유리창 너머 너의 그림자
아픔으로 서성이고
지난날 바람에 일던 꿈은
이제 하얀 핏줄마다
사랑의 흔적으로만 남았다

이슬에 젖은 채 바람에 일던
너의 넋이여!
들꽃이여!

오늘 밤 가슴으로 안은 슬픈 빛
어느 왕조의 미이라 공주처럼
허공 중에 떠도는 하얀 시간
넋으로 잡고
어디일까, 또 하나의 생을 위해
나비처럼 날아가고 있는 곳

하늘, 그리고 바람을 사랑한 들꽃아
우리, 또 한번 다시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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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포도 밭에서


최영희


섞어 친 가지
줄기로 세운 꿈

한 마디
그리고, 세 마디쯤
아리디 아린
포도 알

여름내
포도넝쿨 푸른 잎
보듬은 사랑

칠 팔월
포도 알
달빛에 익을 때

아무도
포도 넝쿨
휘고, 터진 등
본 사람 없네.

~~~~~~~~~~~~~~~~~~~~~~~~~~~~`

 

39) 고향

최영희


빗장 푼
싸리대문
어머니 마음이네
객지 나간 자식들
기다리는,

헛간
낡은 지게
휘어진 내 아버지
뼛골로 걸려있고
뒷 뜰
토담 밑
투박한 오지 항아리
무명치마 질끈 동인
어머님이 계시네

댓돌 위
가지런히 놓인
검정 고무신
어머니, 아버지 외로움이네

거기, 고향은
언제나 이끼 푸른
내 그리움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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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모과나무

설백/최영희


늦가을 서늘한 바람의 눈길
뜨락은 비어 가고
가지마다 휑한 모과나무
그 곁에
내가 서 있네

이른 봄
꽃 피우고
열매 맺어
날마다 무럭무럭
눈에 뵈듯 자랐었지

어제까지 탐스럽던
모과 열매
누가 거뒀을까

해 질 녘 모과나무
지는 해 머리에 이고
가지 끝 시린 눈(目)빛
나처럼 서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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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시월 어느 날

최영희

타는 듯
붉게 붉게 쏟아 내는
나뭇잎들의 깊고 깊은
이야기를 듣고도
슬퍼하지 않으려

구순을 앞둔 스승님
낙엽 밟는 소리
낙엽,
밟는 소리

슬퍼하지 않으려 했다

낮 달처럼
구름에 젖은 둥근 해가
그 태양이
오늘은
그냥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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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그 시간 속에 나를 두고 왔다

최영희

신구新舊,
동서東西가 공존하는 거리
인사 1, 2, 3, 4, 5,,,,,길

지금 내 곁에는
한 5백 년 전의 시간, 어쩌면 미래의 시간,
그리고 동서양의 풍습과 생각까지
나란히 걷고 있는지 모르겠다
난, 지금 어느 시간, 어느 공간 속 나인지 잠시 잊었다

어느 건물 옆에는 裸身의 소녀가
비둘기 한 마리 날리고 있다
전에도 그랬고 현재도 미래에도 어머니시다
난, 저 거룩한 全裸에 입맞춤을 하고 싶다

푸른 색 유리로 가려진
어느 가게 앞에는
들풀이 그대로 수북이 자라 있었다
푸른 유리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오래전의 시간과 현재의 시간이 마주하고 있다
난, 저 유리 벽 문은 열지 않겠다
저 문을 열면 내가 보일 것 같다
언제나 영원이 함께하는 그 세계 속에 나를 두고 싶었다
인사 5길,,,,
난, 그때의 나는 그대로 두고 돌아왔다
아마, 지금도 그 시간 속에는 내가 있을 것이다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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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인사동 찻집에서

최영희


귀천,
,,나 하늘로 돌아 가리라,,
그리고,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시던
옛 시인님이
함박 웃음으로 맞아 주신다
미망인의 미소는 고요하고
진하게 풍기는 커피향기
조그만 공간
옛 시인의
시향만 가득 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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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청솔이 푸르면

최영희


독야청청
백 년,
푸른 솔
가지 끝
송곳 같은 그리움
엄동 설 안 추위에도
그대로
푸르고야

푸르고 푸르러도
이 내 가슴
예닐곱에,
못다 한
어머니
사모(思慕)의 정(情)만
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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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갈참나무 숲에선

최영희


갈참나무 숲에선
조롱새 우는소리가 나곤 했다
먼 산 한번 바라보고
가슴에 부리 한 번 묻고

울 엄니는 추운 겨울날
푸른 솔밭 어린 솔잎 따러 산으로 갔다
아버진 세상 시름 잊게 하는
솔 내 나는 독주가 좋으시대나
어머닌 가끔은
목에 걸린 아버지 설운 삶을 씻어 줄
독주를 담가야 한다, 했다

봄이 가고 가을 가고
겨울도 몇 번을 그리 갔다
기다림도 사랑이라 하시던
아버진 마중을 가고

지금도 저 갈참나무 숲에선
조롱새 운다
먼 산 한 번 바라보고
가슴에 부리 한번 묻고…

~~~~~~~~~~~~~~~~~~~~~~~~~~~~`

46) 시월 마지막 밤

최영희


생각에 잠긴 가을이
또, 한 잎의 낙엽을 지우고 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닮은
허(虛)한 가슴으로 돌아눕는 가을아
난, 오늘 밤 네게
한 편의 시를 보내고 싶다

풀벌레 소리마져
잦아 드는,
누군가 낙엽 밟는 소리도
이제는 차라리 평화롭지 않은가
어둠마저 평온한 창 밖엔
고요가 내리고 있다

아! 이제는 떠나는

내게서 떠나는 사랑까지도
사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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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오지 항아리

최영희


첫 살림 날 때
시어머님이 살림 1호로
마련해 주신 오지 항아리 3개
해마다
간장, 된장, 고추장
알뜰히 담가 햇살 우려
가난한 우리 밥상 일 년 찬(餐)이 되었지

풍상 같은 세월
어머님은 가시고
너도 늙고 나도 늙었구나

앞마당
햇살 같던 아이들 웃음소리
어른이 되고
하릴없는 너와 나
너는 아파트 베란다 창가에
나는 거실 소파에,

함께한 사십 년 세월
서로를 버리지 못함은
가난한 세월 함께 살아온
애틋한 정(情) 때문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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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추석 다음 날

최영희


창 밖
멀리
까치 소리 참 요란하다

내, 시댁 조상님 모시느라
친정엘 못 갔더니만
내 어머니, 아버지
나 없는 젯상 받으시고
까치를 빌어
나보러 오셨나 보다

까치 소리 멀어져 간다
어머니, 아버지 나 둘러보고 가시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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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아들아 딸아 미안하다

최영희


어느 모임에
역시 돈錢,
돈錢이
차림 상 위 제일 먼저 앉는다
이 백 오십 만원이라나
손가방 하나가 혼수의 기본이란다
억억,
수억 수십억 아파트가
쉽게도 오고 간다
시인은,
가난한 시인은
무엇을 이 화제의 식탁 위에 올려놓을까
가난은 그렇고
풀 냄새 나는
시집 한 권,
체면은 치렀을까
아들아 딸아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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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가난한 엄마의 노래


최영희


좋아라
주머니 탈탈 털어
지난 여름 푹푹 찌는 더위에
괭이 눈처럼 지친 아들네가 안쓰러워
찬바람 나는 기계 하나 달아 주니

올여름엔
아들 손자, 며느리
원두막 같은 집에 누워
하늘에 별도 보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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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서울의 달

최영희


한가위 날
중천에 홀로 뜬
서울의 달
쓸쓸키도 하구나

건물들은 우뚝우뚝
자랑스레 섰것만
그리는 고향마을 옛 정취
삿갓구름 먼 산봉우리마다
짙게 누르고

서울,
나의 서울은
거리마다
소슬바람만 이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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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찔레꽃의 전설


최영희


봄이면 산과 들에
하얗게 피어나는 찔레꽃

고려시대 몽고족에
공녀로 끌려간
찔레라는 소녀가 있었다네

십 여년 만에 고향 찾은 찔레 소녀
흩어진 가족을 찾아
산이며 들이며 헤매다
죽고 말았다네

그 자리에 피어난 하얀 꽃
그리움은 가시가 되고
마음은 하얀 꽃잎, 눈물은 빨간 열매
그리고 애타던 음성은
향기가 되었네

내 고향 산천 곳곳에 피어나는
슬프도록 하얀 꽃
지금도 봄이면
가시 덤불 속
우리의 언니 같은 찔레의 넋은
꽃으로 피네.



*찔레꽃 전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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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이유 있다

최영희


하늘을 나는
새야,
날아라
바람에 이는
풀잎의 작은 흔들림도
이유는 있다

새야,
구름산을 넘는 새야
우리, 세상 속에 들어 보자
깊고 깊은 산골짜기
피었다 지는 꽃 한 송인들
그냥 이야
피었다 지겠는가

새야
너,
그리고 나
그냥 이야 왔을까
잠간 일다 가는 바람도
이유는 있다
우리, 들어(聽)보자
너, 나 그리고 우리 모두
오고 가는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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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건배(乾杯)

최영희


방금 내가 지나온 도로변엔
우수수 낙엽이
별 밤처럼 쏟아지고

종각 역 지하터널
지금 내가 아닌 부처가, 하나님이 이 길을 가다
저들을 보았다면 어찌하셨을까
통곡하는 자도 없이,
폐 종이상자로 이미 스스로의 집을 지은 듯
어둠과의 경계를 위한 더 깊은 어둠, 그 속엔
소리도 미동도 없다

아직,
잠에 들지 못한 자들이여!
삼삼오오
무엇을 향해 건배를 하는가
시계는 자정을 향하고 있다

생(生)과 사(死)의 경계
둥둥둥,,, 누군가 출발을 알리는 북소리
누운 자의 발가락이 꼼지락거린다
어딘가로 떠나고 싶은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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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夜花

최영희


어둠에 핀 꽃

슬퍼라
아름다워라
용산 역 뒤
대낮에도 어둑한
골목
유리상자 속 터질 듯한
붉은 장미여
타는 듯한 그대
독사 같은 붉은 혓바닥이여
넌,
천 년을 기다려
유리관 속 피어난 꽃이어라
아-
가여운 꽃잎이여
여자여
바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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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간이역이 된 내 고향

최영희

내 고향
단양,
낯선 사람끼리 만나도
따듯한 정이 오갔던 사람들
한참만에 오는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주고받던 삶의 이야기가
훈훈한 체취로 남은
긴 나무 의자가 있는 역사(驛舍)를 지나
어머니 손을 잡고 건너던 흔들 다리, 그리고
놋재를 지나 읍내로 가면
한 5백 년쯤 되었을까?
옛 유림들이 유학을 하던 향교가 있고,
경찰서, 초, 중, 고등학교,
조금만 돌아서면, 우표 없는 풀잎엽서 한 장
몰래 넣고 싶던
빨간 우체통이 있던
내 고향

40여 년 만에 만난 어릴 적 친구들
돌아, 돌아
흐르는
충주댐의 저 물줄기
가슴 속 이 그리움 알기나 할까
죽령고개 똬리 굴을 지나 南으로 가는
낯선 사람들의 중앙선 우등열차는
잠시 선, 新 단양 역을 지나
내 고향 단양 역은 그냥 지나나 보다

고향 역 오래된 측백나무
때때로, 지금의 나처럼 슬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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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오만(傲慢)

최영희


누군가 늘 함께 한다고 생각했지
아니, 사실 결국 혼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게지
그래서 가끔은 고독을 즐기는 오만도 부렸어
하루같이 변화해 가는 신의 도시를 보고
내가 부린 오만이 고독이 아니라 고립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함께 어울려 살던,
저것 좀 봐! 저것 좀 봐!
늦은 가을 저 나무들의 평안함
가끔은 세계와의 부딪힘
그 고뇌의 덩어리조차 한 잎 한 잎 다 털어 내고
평안한 저 눈빛 좀 봐!
올가을 나뭇잎은 또 한 번 육신의 허물 벗고
하늘나라 별이 되고 달이 되고
저 나무의 영혼, 또 한 번 가벼이 하늘을 훨훨 날아오를 때
저 화실 유리창에 비치는 모나리자의
의미 있는 싸늘한 미소 좀 봐!
난, 지금
저 아름다운 모나리자의 싸늘한 미소조차 가질 수 없어
나를 둘러싼 이 고독의 창,
오만이야! 오만,

저것 좀 봐!
늦은 가을
저 나무들의 오롯한 평안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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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빈 집

최영희

그녀의 집은 고요합니다
아침이면 부신 햇살과 마주하는
텅 빈 거실이
가을 곡(穀)을 거두고 난 들녘처럼
한가롭습니다
따끈한 모닝커피 한잔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녀는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 속 아이들과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그 아이들이 엄마, 엄마 부를 때면
그녀의 눈엔 생기가 돕니다
허공에서 들리는 소리는
공명을 울리 듯 청량합니다

그 여자의 집은
허물을 벗고 달아난 풀벌레 집 같은
바람만 가득한
빈집이 아닙니다
그 집에는 그녀의 아름다운 추억과
삶의 기억들로 가득합니다
때론, 까르르 아이들의 웃음 소리가
거실 가득 쏟아집니다
그녀의 집은 빈 집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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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내가 사는 도시에는

최영희


내가 사는 도시에는
언제부턴가 우뚝우뚝 섬이 솟는다
스스로 혼자가 되어 가는

밤이 되면, 어느 낯선 밤 바다의 부두처럼
멀리 희미한 불빛만 가물거리고
투망처럼 건져 올린 나의 시간엔
한껏 자라 오른 그리움
또 하나의 섬이 된다

한둘 상가의 문들 셔터가 내려지면
거리마다 오고 가는 불빛
그 슬프도록 빠알간 불빛들은
잠들지 못한 도시의 고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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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시인(詩人)

최영희


시인의 가슴엔 슬픔이 많다
때론
푸른 하늘을 보고도
조롱히 열린 열매를 보고도
바람에 출렁이는 나무들의 몸짓을 보고도
애증처럼 밀려왔다 밀려가는
바닷가 파도를 보고도
그들의 슬픔, 그리고 아픔을 본다

시인의 가슴엔 사랑이 많다
작은 풀잎의 흔들림으로
그 풀잎의 마음을 읽는다
꽃잎을 지우는 꽃나무의
마음의 소리를 마음으로 듣는다
그리고 함께 아파한다

그래서 이 땅에 많은 시인들은
함께 나눈 그 슬픔을, 아픔을, 사랑을
하얀 백지 위에 문자로 남긴다
그것은,
가슴으로 부르는 사랑의 노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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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하얀빛은 슬프다

최영희


언제부터인지
하얀빛은 나를 슬프게 한다

가난하던 날 이밥처럼 쏟아지던
조팝나무 꽃이 그렇고
아버지 허리 굽어 넘던
싸리 재 싸리 골
길섶, 하얀 들꽃들이 그렇고
오솔길 덤불 사이 외 목 늘여
점점 멀어지는 이
하염없이 바라보던
망초꽃의 쓸쓸함이 또한 그렇고
친구가 떠나던 날
백지 위에 올려진 국화꽃의 하얀빛은
나를 더욱 슬프게 했다

그리고 봄날에 쏟아질
부신 햇살 속
한 뼘만큼의 나의 여백
또한 슬프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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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겨울로 가는 길

최영희


수북이 낙엽으로 쌓인
숲길을 따라
성근 가지로 선 나무들
난 지금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길을 가고 있다

어느 詩낭송회장에서
노(老)시인이 불던
오카리나의 맑은 음색, 그리고
푸른 날 새들이 살아 낸
전설 같은 이야기가 수런수런 들리는
빈 숲길

내게 주어진 고적한 이 시간이여!

나는 무엇을 그토록 사랑 했을까
무엇을 그토록 목 말라 했을까

귓결에 들리는
어미를 쫓아 이 길을 떠났을 산새소리
길가에 선 저 감나무도
아직은 곰 익은 감하나
떨구지 못하고 있구나

겨울로 가는 길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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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약속

최영희


오늘은 누군가의
천 년의 약속처럼 눈이 내려요
우리 모두의 사랑하는 일이
천 년의 약속이었다면
오늘은 그 약속의 언어들이
고요함으로
세상을 순백으로 눈부시게 했어요

사랑하는 일이
어제오늘 일로만 되는 건 가요
여기 백치 같은 사랑이 있어요
마리아 같은 순결한 여인 앞에
한 남자가 뒹굴며
모든 기억은 다 놓아 하얀 백치가 되어도
그녀 앞을 떠날 수 없답니다

오늘은
사랑한다는 그 남자의
그때 그 약속 같은
하얀 눈이 내려요.

시작노트;
내 친구 중 교수이던 남편이 기억을 잃어 간다는
알츠하이머로 십 년째 투병 중입니다
아이의 눈빛 같은 천진한 눈빛,,그 눈빛 속 어딘가에
아내와의 사랑했던 기억이 남아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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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함박눈 오는 날

최영희


나무도 건물도 침묵으로 있는
도시의 거리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립니다
나무마다 송이송이
그리움은 눈꽃처럼 피어나고
저 고요한
숫눈길 위
사뿐히 걸어간 누군가의 발자국
내 그리운 사람도
저 눈길 따라
인제는 오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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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겨울 담쟁이

최영희


봄날에 지녔던 푸르던 꿈과 소망
길을 가다
담장에 달라붙은 겨울 담쟁이 앞에 발을 멈춘다
내가 살아온 길만큼
담쟁이 살아 낸 길도 복잡하다
생각에 잠긴다
볕을 따라 오르다
밤에는 달을 보고 별을 보고
앞만 보고 살아 냈을
핏기 마른 가슴, 연민으로
코끝이 싸아-하다

부서지는 겨울 햇살
빨랫줄에 삶아 빤 옷가지를 털어 넌다
내 낡은 팬티가 햇살에 웃고 있다
담벼락에 매달린
마른 담쟁이, 그 싸아-한
느낌으로…

~~~~~~~~~~~~~~~~~~~~~~~~~~~~~~~~```

66) 친구의 편지

최영희

친구에게서
고향의 구름을 걷어 쓴 편지가 왔습니다

우리가 향수에 젖는 것은
풀 내 나는 비릿한
그리움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람 끝에 묻어, 끝도 없이
어머니 아버지 무덤가에 이끼로 내려앉는
습한 그림자 하나 걷지 못하는
애틋함 때문만도 아니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의 날갯짓처럼
우리 가슴에는
언제나 허공에 너울지는
고향을 향한 영혼의 몸짓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나고 지는
풀한 포기도 제 뿌리내린 흙의 내음은
쉽게 덜지 못 하겠거니
우리 가슴에는 늘, 안개처럼 젖어드는
고향이 있었습니다
친구여,
내게 보내온 편지는 잔잔한 바람이었습니다
누었던 풀 포기가 바람에 일렁이듯
우리의 서러웠던 기억까지 그리움의 물결을 이룹니다
편지 속에는, 학교 가는 길
한낮의 굽이를 넘기는 애절하던 새소리,
그리고 가슴을 에이듯 씽씽 울어 대던
놋재를 돌아온 바람소리도 들립니다
그곳이,
그곳이 우리의 고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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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청령포 가는 길

최영희

청령포 맑은 물
천년을 돌고 돌아 흐르고 흐르건만
어린 왕의 천추에 恨
언제나 씻어 낼까

나룻배에 몸을 실어
세월을 건너가니
오백년, 열 일곱 어린 왕의 한숨소리
우거진 솔숲사이 떠나지를 못하고
망향루에 올라보니 한양 땅 두고 온 왕비를 그리는 그리움
하나, 하나 돌을 쌓고, 두 달여 쌓은 돌은
정한(精恨)의 탑이 되어 오백 년 비바람도 무너뜨리진 못했구나

御所에 걸려있는,
“ 천추에 원한을 가슴 깊이 묻은 채// 적막한 영월 땅 황량한 산속에서
만고의 외로운 혼이 홀로 헤매는데// 푸른 솔은 옛 동산에 우거졌구나
고개 위의 소나무는 삼계에 늙었고// 냇물은 돌에 부딪혀 소란도 하다
산이 깊어 맹수도 득실거리니// 저물기 전에 사립문을 닫는다.”라는
御製詩는 내 가슴을 쓸어내고
돌아서는 이내 마음
어린 왕을 이곳까지 후송하고 차마 발길 돌리지 못해
강나루 홀로 앉아 통한의 詩를 읊은 왕방연의 충심에다 비할까만,
왕이시여!
왕위찬탈 1457년 6월 22일,
사약을 받으신 1457년 10월 24일,
17세의 어린 나이로 승하하신 그날의 恨
어느 세월 푸시리까

돌아서 오는 길
청령포 강물의 오백 년 울음소리
시린 귀가 젖는구나.

~~~~~~~~~~~~~~~~~~~~~~~~~~~~~~~~~~~~~~~~~`

68) 임은 가시고
- 숭례문을 잃고-

최영희

600년 민족의 굴곡의 역사 가슴에 묻고
묵묵히 우리 민족을 지키는 어버이 모습으로
언제나 그 자리 그대로 영원할 것 같았던
임,
임은 한 광인의 불질로
무자년 정월 초나흘
온 국민의 안타까움 속에 그렇게 가셨습니다

숯검정으로 남은 임의 자취
사십 년 전 산 소녀의 눈으로
처음 뵈올 적
그득히 담긴 나라님의 체취가
어버이처럼 푸근했거늘
재로 변해가는 임의 육신에 훨훨 타오르는 불길을
바라만 보아야 했던
부끄러운 이 시대 우리들의 자화상

임은 가시고
아-, 임은 가시고
양녕대군이 쓰셨다는 현판이
툭! 떨어져 내리는 순간
우리의 자긍심과 자존심이 함께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
이제 저 하늘 빈자리
무엇으로 채울까

~~~~~~~~~~~~~~~~~~~~~~~~~~~~~~~~~``

69) 사모곡(思母曲)

최영희


어머니
당신이 내 어린 손을 놓고 가신 뒤
세어보니
쉰번째 유월이 왔습니다

처음 그 해는
제게는 낮과 밤이 없었습니다
내 앞엔 영원히 밤만 있을 듯
캄캄하기만 했습니다

봄마다 새로 돋는
풀잎을 봐도,
슬픔이더이다

죽을 것만 같던 세상
그래도 살아 지더이다
나처럼 가난한 한 남자를 만나
여자가 되고
엄마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제게 다하지 못하고 가신 사랑까지
원 없이 사랑했습니다

정말 죽을 것만 같던 캄캄한 세상
어머니는 사랑하는 법만은 제 가슴에 심어주고 가셨습니다

어머니!
오늘도 창 밖 저 산등성이로는
노을이 타는군요
저 노을이 다 타고 나면 어머니, 잊힐까

~~~~~~~~~~~~~~~~~~~~~~~~~~~~~~~~~~~`


70) 어머니 나라

설백 최영희


이 세상에
사랑하는 모든 것들이
내게서 떠난다 해도
가슴으로 부르는 당신을 향한 내 사랑의 노래는
멈출 수 없어요
나에게 주어진 이 세상이 끝나는 그때까지는
내 가슴에 간직된 뜨거운 사랑의 불길은
꺼지지 않을 거예요
봄이면 산에 들에 꽃으로,
여름이면 깊고 깊은 숲 속 바람으로 노래할 거예요
가을이면
다 하지 못한 내 사랑의 언어들은
온 산을 붉게 물들일 거예요
온 산이 타는 듯 붉게 물들어 오면, 그때는
내 가슴엔 뜨거운 눈물이 흐르겠지요

그리고 또 계절이 가고 눈이 내리면
처음 같은 그 길을 걸으며
그때에도 난 다시 당신을 향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를 거예요
아-, 내 가슴에 불처럼 타오르는
당신을 향한 이사랑은 끝나지 않아요

내가 나고 내가 죽을
어머니 나라, 그곳은 내 사랑이었습니다.

~~~~~~~~~~~~~~~~~~~~~~~~~~~~~~~~~~~~~`

71)
바람같이 살려네

최영희

바람같이 살려네

간혹 마음이 울적할 땐
숲을 이룬 소나무 사잇길을 걸으며
오랜 기억처럼
우수수 쏟아지는 묶은 솔잎 위에 앉아
지나는 새 소리도 들어 보려네

사랑하는 사람들
한둘 떠나버린 비어가는 공간의
아픈 상념
훠이 훠이
실어 내는
바람같이 살려네

한적한 들길도 걸어 보려네
풀잎끼리 부딪는 내음이
어릴 적 함께한 친구의 정겨움처럼
코끝을 시큰하게 하는
들길에 누워도 보려네

어디고 머물렀다 흔적 없이
훨훨 날아가는 바람이 좋아
바람처럼
살다 가려네.

~~~~~~~~~~~~~~~~~~~~~~~~~~~~~~~~~`

72) 아리랑, 아리랑

최영희


TV에서
한 젊은이가
아ㅡㅡ리랑, 아ㅡ리랑
아라리요ㅡㅡㅡ
노래를 한다

아ㅡ, 저 아리랑 구절에 담긴
恨의 소리여!
저 소리는
가난한 우리들의 어머니 아버지,
그 할아버지 할아버지적부터 모질고 모진 세상을 살아 낸
恨이요, 가슴으로 부른 魂의 가락이다
우리의 한 젊은이가 어깨를 들썩이며 부르는 우리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ㅡ, 오늘은 나도 신들린 듯
저 아리랑을 부르고 싶다.

~~~~~~~~~~~~~~~~~~~~~~~~~~~~~~~~~~~~~~~~

73) 아이러니

최영희


모르겠네
꽉-찬 도시가 더욱 외로운 건
모르겠네, 정말 모르겠네
하얀 흙먼지 일며 소달구지 몰고 오는
할아버지 기다리던 그 길보다
씽씽 달려와 내 앞에 많은 사람
우루루 쏟아놓는
버스 기다리는 그 시간이 더 외로운 건
모르겠네
산골짝 단칸 초가 우리, 그때 그 집보다
빽빽한 이 아파트가
더 고독한 건
모르겠네, 정말 모르겠네
아이러니야
오늘도 아침이 되자 희미하게 흐르던
아파트 불빛이 하나하나 또 사라지네
창(窓) 밖엔 종일
또 침묵이 흐르겠네
내 창(窓)가에 별이 찾아올때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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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가을 정사(精思)

설백/최영희


사랑만치 뜨거운 것이 또 있으랴
거리를 나서 보면 안다
그 어지러운 심사

사랑은 언제나 또 한 아픔이다
한바탕 꿈이었나 보다
어지러운 거리를 보며
그 또한
사랑한 흔적이 아니던가
가을이
씁쓸히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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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부처꽃

최영희


몇 겁의 연緣을 살다
탈속하고
부처,,, 꽃
청 빛, 하늘가 연못가 아니하고
덤불 속 편안도 하시구나
칠 선녀 고이 보내
연못 위 선善으로 앉히시고
무지렁이처럼 아무렇게나 자란 풀숲
눈에도 잘 뵈지 않는 밥풀 만한 보랏빛
꽃, 부처라 한다
바람이 마구 흔들어 댄다

역시 탈속일까
부처의 미소
참 평안도 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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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 슬프도록 푸른 물고기 같은 사람이여
-어느 알츠하이머 환자의 이야기

최영희


어느 거실 조그만 어항 속
푸른 물고기
슬프도록 맑은 눈망울을 깜박이고 있다
그 물고기 이 조그만 어항에 들기 전에는
밤이면 별이 내리는 넓고 넓은 바다에서 날마다
푸른 꿈을 꾸었답니다
이제 까맣게 바다를 잊은
이 물고기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슬픈, 아니 행복한 어른 아가가 있습니다.
천사만이 이 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답니다
그 어른 아가도 물고기의 바다 같은 살아온 세상의 기억은
잊었답니다
자신이 그 멋지고 푸른 바다를 꿈꾸는 해양학과 교수였다는 사실도,
곁에 있는 그리도 사랑했던 아내도, 두 남매도
잊었답니다, 말도 잊었답니다
푸른 물고기와 그 어른 아가는
오늘도 슬프도록 맑은 유리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전생 같은 시간의 기억은 잊은 채
눈으로 눈으로만
둘만의 이야길 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간 속 이야기인지는 천사만이 안답니다
잊고 잊어 너무 맑은
슬프도록 푸른 두 영혼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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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미소가 맑은 그대
- 어느 언어장애 소녀를 보고
최영희


미소가 맑은 그대는
한 송이 꽃이어라

그대의 고요한 미소만으로도 세상은 행복하여라
그대 고운 향기는 슬픈 자의 영혼에도 위로가 되리라

수선화 닮은
그대의 순수함은
이미 세상에
평화의 문을 열었노라

내가 본 세상에서
가장 미소가 맑은 그대는
봄이어라
마주하는 호수처럼 맑은 눈빛
아! 그대는 갓, 사랑을 느낀 소녀여라
눈으로 말하는
영혼으로 말하는 그대는
그대로 한 송이 꽃이어라.


2007.2 어느날 지하철 안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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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시가 있는 서정마을
글쓴이 : 설백/최영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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