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_DAUM->제1시집 작품 모음
1. 자화상(自畵像)
최영희
하얀 종이에
파스텔로 내 얼굴을
그렸습니다
머리칼도 눈썹도 입술도
하얗게 그렸습니다
아무도 알아 보지 못하는
슬픈 나를,
하얀 눈물을 그렸습니다
아무도 내 슬픔은 알아 보지
못했을 겁니다
그 속엔
나만이 알 수 있는
슬픔이 있습니다.
2. 이상(理想)
최영희
오늘 아침이라도 새가,
파랑새가 내 창가를 난다면
나는 고요히 새의 집을
지으리라
울타리 안에는 푸르고 싱싱한
정원을 들이리라
그리고 창을 열어 두리라
파랑새,
하늘을 날아 오르는 자유로움 위해
날마다 날며, 날며 물어들인 하늘조각도
푸른 가지 위에 걸어두리라
그리고 창가로 가
숲을 가득 넣은 우전녹차 향에 가슴을 적시며
기다리리라
새들이 즐거이 노래 할 수 있는
내 이상
理想의
푸른 날.
3. 폐 선 // 최영희
오래된 시간의
희미한 빛
소금기 머금은 갯가 한켠
비켜 앉은 낡은 어선
창문을 두드려본다
어선은 빈 집처럼 기척이 없고
오랜 기억만
반쯤 부식된
닻줄에 걸려있다
지금 막
머나먼 길 에우고 온 바다는
짜디짠 포말만
한시름 쏟아놓고
멀리, 등대
누군가, 올 이 있어
불을 밝힐 때
푸른 시간은
저만치
파도에 밀리고
부둣가 주막에선
어제, 바다 위
날 선 맨발로 걷던 어부
소주 한잔으로
목에 걸린 삶을 씻고 있다.
4. 여로(旅路)
최영희
나 어릴 적
꿈이 있던
그 자작나무 숲 속
눈이 까만 풀벌레들은
몇 겹의 옷을 벗고 하늘을 날았는지
배추흰나비는
무 장다리 꽃잎 지는 날
바다의 여행을 떠난다 했다
끝없는
긴 여행
풀밭에 앉아 쉬는
어느 날
그 풀벌레를 만난다
배추흰나비를 만난다
아름다운 만남이었지
그리곤,
우리는 다시 긴 여행을
떠나야 한다.
5 사유(思惟) // 최영희
어디쯤 가고 있을까
이 열차
사유의 차창 밖
참 많은 것을 보았지
아름다웠어
하늘, 산, 바다 그리고 우리들의 만남이
별이 있는 밤에는
많은 꿈을 꾸었어
새로운 세상에로의 환희에 젖어
참 많은 것들이 날 행복하게 하였지
사랑할 것이 너무나 많았어
사람, 꽃, 바람, 그리고 우리들의 만남까지도
모두가 사랑이었어
아름다운 세상
지금도 꿈을 꾸고 있어
두려움과 함께 새롭게 다가오는 모든 것이
내겐 새벽이슬 같은 신선 함이야
하나하나 새기고 가야 해
어느 날 누군가가 내게 물으면
아마 어느 시인의 말처럼
아름다운 세상이었다고 말하고 있을 거야
내게 주어진 이 세상에서의
긴 여행
지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별이
내 곁을 지나고 있나 보다.
6. 달팽이 // 최영희
하늘
구름 한 점
햇볕 따순 날
풀섶에 앉아본다
달팽이 한 마리 집을 등에 지고
어디론가 떠나고 있다
허공이 움직인다
달팽이 등에 실려
가고 또 가도
채우지 못하는 세계
가다 지쳐 누운 곳이
제 자리련가
어디를 가든
세계는
늘 허공.
7. 매화(梅花) // 최영희
눈(雪),빛
검은 등걸 위
혼신으로 피워낸
순백의 꽃
볼을 타고 내리는
2월의 냉기 속
끊길 듯 가녀리게 세운
한 끝, 그리움
내 어쩌란 말인가
시린 빛도 타들 듯한
너의,
무구한 사랑.
8. 바닷가 빈집 // 최영희
바닷가
빈집 한 채
바람이 살다 갔다
처마 밑엔
텃밭에 씨감자 꼭꼭 박아 심던
할아버지 장죽 두드리던 소리만 달려있고
무쇠솥 걸렸던 자리 솥뿌리마저 뽑힌 채
검게 그을린 아궁이 앞엔
부지깽이로 다독이던 가난한 여인의 삶이
얼룩으로만 남아있다
산그림자 내려와
사람이 살다간 채취마저
무덤 속에 잠들이고 싶었으리라
애증일까
무릎이 내려앉듯
주저앉으면서도 버텨내는
바람이 살다간
빈집
모두가 떠나버린 뒤에도
돌담 너머
슬픈 눈빛으로 반기는
떼찔레꽃
아마 저 집에 살다 간
계집애의
애틋한 정情인가 보다.
9. 세월 // 최영희
세월은 밤에도 잠들지 않는다
때로는 칼날같이
때로는 봄바람같이
어디론가를 향해
쉼 없이 움직인다
이쯤에서 잡아볼까
꽃 핀 자리
나비 옆에 앉혀 볼까
봄은 좋아하려나
밤새
창 밖에 들리는 꽃 울음소리
또, 갔나 보다.
10. 나는 영광에 취해 걷고 있습니다 // 최영희
나는
가난한 내 어머니 아버지의 딸입니다
그리고 영광스러운 내 조국의의 딸이요
억만년을 이어갈 내 후손들의 어머니입니다
나는 지금 영광에 취해
즐비한 상가 속을 걷고 있습니다
내 조국엔 지금
가는 곳마다 먹거리가 넘쳐나고
가는 곳마다 국적도 모르는 입을거리가
넘치고 있습니다
님이시여
난 지금 영광에 취해 걷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내 영혼
잃는 것이 무엇인지
난 지금 영광에 취한 채
알 수 없는 슬픔에 젖어 걷고 있습니다.
11. 개화(開花) // 최영희
어제 밤
내내
고요한 달빛
멀리
새 신부 옷고름 푸는 소리
방금 우리 집 창가 진달래
앞섶이 열리고
살짝 보인다
꽃술 속 연분홍 가슴
난 아무것도
본 것도 들은 것도 없다는데
오늘 아침
진달래는
고향집 우물가
물동이 이고 나온 새언니 얼굴보다
더 수줍다.
12. 그리움의 노래 // 최영희
꽃길을 따라갔다
들로 숲으로
지나는 바람과
꽃들에게 물어보았다
꽃이, 바람이 모른다네
내 가슴속
그리움
눈이 내리네
성당의 종소리처럼 고요히
눈길,
어머니가 걸어가셨네
멀리 가시네
눈은 계속 내리네
그리움의 노래처럼
내 가슴에.
13.고갯길 // 최영희
어머닌, 아직
나를 업고 저 고개를 오르신다
저만치 보이는 소금무지산
굽은 고갯길
어머니 힘겨운 숨소리
솔숲을 지난다
묵은 햇살
여린 소나무 가지 끝
볼을 부비고
산사에서 들려오는
불공소리
두손 모으신 어머니는
아직도 그곳에 계신다
바람이 희끗한
내 머리칼을 스치는데
어머니, 이제
이승에서의 근심의 끈
놓으소서.
14. 그곳에 가고 싶다 // 최영희
가고 싶다 그곳에
사람들은 지금도
도시가 좋아
도시로 도시로 모여들지만
봄이면
뒷산 거기쯤
머루랑 다래 순
눈뜸 하는 곳
갯도랑 징검다리
고향의 내음처럼 물이끼 내려앉고
하루에 한두 번 지나는
기차소리 멀게만 들리던
산골마을
어머니, 아버지
고단했던 삶의 흔적
바람에 실려 산길 들길에
젖어 있는 곳
도시의 삶
점점 외롭게 느껴지는 날
지금 나
그곳에 가고 싶다.
15. 산딸기나무 숲을 지나며 // 최영희
산딸기나무덩굴 숲
꽃을 피웠던 가지마다
봄을 안은 햇살이 곱다
하늘은 맑고 지나는 바람
상념까지 흔들어 놓는다
무심히 떠가는 구름 한 점
굽은 산자락, 꿈꾸던 산딸기나무
덩굴 이룬 사연 알까
꿈이 많던 어느 산 소녀
가끔은 조그만 언덕 숲을 찾았다네
아마 산딸기나무 숲이었다지
소녀는
밤마다 일기장에 혼잣말을 적듯이
찔레꽃 송이마다 꽃말을 하나씩 달아 주었대
너는 내 슬픔, 너는 나의 꿈, 그리고 너는
나의 사랑
하늘은 그때도
가끔은 비를 내리곤 했어
산딸기나무는 소녀가 찾을 적마다
하얀 꽃을 한 송이씩 줄기마다 피워 주었지
소녀의 슬픈 미소를 사랑했나 봐
몰랐지 그 때의 슬픔
아름다운 노래가 될 수 있다는 걸
오늘은 산딸기나무 가시덩굴 숲에서
꽃잎처럼 뚝뚝 떨구고 간
슬프도록 하얀 발자국을 보고 있어
그림자 하얀.
16. 목련 꽃 지는 밤 // 최영희
바람도 잠시 숨을 멈춘다
예견된
슬픔
3월 그믐 밤
달빛은
차마 눈을 뜰 수 없었다
어둠에 내려앉는
날개 젖은 흰 나비처럼
넋으로 혼절하는
하얀 순수
사랑한 기억
목련 꽃 지는
봄밤이 섧다.
17. 가을에 쓰는 편지 // 최영희
하늘 나라에도 가을은 왔을까
이번
우체국 가는 길엔
어머니, 아버지께
소식을 전해야지
단풍잎에 쓸까
은행잎에 쓸까
마음속 그곳
왜 이리도 멀었을까
너무도 오랜 시간
기억은 하실까 몰라
그리고
잊지 말아야지
초대글
어머니 아버지
제 아이
올 가을
시집을 가요.
18. 가을비 // 최영희
불붙듯 타오르는
가을 산
비가 내리네
종려나무 숲을 닮은,
가슴 속
내 사랑아
푸른 날의 시간
바람에 가네
빗방울에 부서지네
사랑한
우리들의 이야기
비가 내리네
차가운 비가 내리네
아, 이제
구름 따라 바다로 가는
가을산을 보아야 하네.
19. 가을 길 // 최영희
얼마쯤
가셨을까
낙엽 위에
남기고 간
발자국들
내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지금
그 이야기들을
가슴으로 듣고 있습니다
소복이
낙엽 쌓인
가을 길
님들이 가셨던
이 길을
지금, 나도
그리 걷고 있습니다.
19. 들국화 피는 계절엔 // 최영희
들국화 피는 계절엔
당신이 생각납니다
들국화를
무척이나 좋아한
당신
사랑하는 마음
어떻게 전해야 할까요
하늘빛 파란 편지지위에
들에 산에 핀 들국菊의 향을 담아
한 줄의 詩처럼 써야겠어요
창문을 열었어요
바람이 차가운 내 이마를 스치고 지납니다
당신과 내가 사랑한 모든 기억을
흔들어 깨우고 있습니다
편지를 쓰겠어요
들국화 피는
아름다운 계절
나
아직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고.
20. 가을에 우는 새 // 최영희
아파트 숲에서 우는
새야
너도 나처럼
정情이 그리워
우는가 보다
잎을 지운 나뭇가지 끝 시린 햇살
오늘아침
네 우는 소리는
더욱 애닯다
늦은 가을
하늘이
높구나.
21. 풀잎도 슬픈가 봅니다 // 최영희
해질녘
한강으로 가는
산책길
슬픈 눈의
풀잎의 이야길 듣고 있습니다
이른 봄
자라 오르던
별처럼 푸르던 눈빛
바람이 불어도
나비가 날아와 볼을 부벼도
풀잎은 기뻐하지 않네요
풀잎도
나만큼이나
저만치 가는 가을이
슬픈가 봅니다
가는 가을.
22. 연민(憐憫)
-중국여행에서 // 최영희
연민의 정精은
사람에게만은 아닌가 봅니다
중국의 수도 북경의 천안문광장을 지나
한참을 가다 보면
차창 밖 시골아이처럼 순박한
노오란 오이꽃
덤불 속 파란 순을 따라오르다
낯선 듯 수줍게 바라봅니다
서로가 낯선 그러나 우리는
하늘 아래 잠시라도 함께 한 존재
이 길이 아니면
모르고 그냥
지났을 걸
이념이 다른 땅도 흙의 내음은
같은가 보다
여기서도 너의 얼굴은 여전히 노오라니
참 예쁘다
내 바람같이 스쳐 지난다만
이곳 설은 중국 땅
너의 소박한 미소는
오랫동안
잊히지 않겠다.
23. 바다의 아침 // 최영희
내가 아직
꿈을 꿀 수 있다면
밤새 바닷바람에
씻기고 씻기어
부드러운 속살로 누운
저 바다에 누워 보고 싶네
잔잔한 은회색 융단길
아버지 큰기침소리 들리기 전
내게 아직
처음으로 내리는 눈빛 같은 순수함이 있다면
고요한 아침바다
저 가슴에 안겨보고도 싶네
저 황홀한 바다의 처음에
내 영혼의 모두를 드리고 싶네.
24. 눈 내린 날 // 최영희
처음의 세상처럼
첫눈 내린 날
멀리 성당의 종소리
새 한 마리 날아 오르고
누군가 가장 깨끗한 발로
저 눈길을 걸으라는데
난
눈으로
눈으로만 동화 같은 은빛세상
새처럼 날아 오르다
내 발을 보았네
세상의 처음 같은
첫눈 내린 날
누가 저 눈길 처음 걸을까.
25. 나의 영혼아 // 최영희
지친 영혼아
해지는 서녘 하늘가에
머무는 시선아
오늘도 한 줄의 시를
가슴으로 읽었느냐
땅거미 지는 길을 걸으며
먼 옛날 시인이 남긴
헌 시집 속에
꽃의 말을 들어보자
스치는 바람의 소리를 들어보자
외로움에 흔들리는
너의 그림자
나의 영혼아
가슴에 담자
위로받을 수 있는
한 줄의 시
그리고 알아보자
그 속에 있는
사랑.
26. 상념(想念) // 최영희
어느 호기심 많은 아이가
상자 속에 내 몰골을 닮은
달팽이 한 마리를 넣어 두고
부처님 손바닥만 한 세상을
깔아 주었다
아이는
그 손바닥만 한 세상을 허덕이며 기어 다니는
꼭, 나를 닮은 달팽이를 날마다 들여 다 보며
마음이 아팠으리라
깎은 절벽 같은 상자의 벽을
기어오르다간 떨어지고 또 기어오르고
그러다 오르기를 포기하고 돌아서는
달팽이의 뒷모습이
무척 안타까웠으리라
아이는
오늘도 무엇인가를 찾는 듯
반 자만큼 젖은
상자 속 세상에서
골몰하며 헤매는 달팽이를
보고 있다
내 모습을 보고 있다.
27. 바람의 아이 // 최영희
작은 꽃잎을 흔들고 있는 넌
바람의 아이 인가 봐
떠돌다 외로움에 지쳐
꽃잎 위에 머무는
그리워 그리워서
내 어머니 온화한 미소를 닮은
꽃잎 앞에 멈춰선
나를 닮은 너
산 그림자
슬픔처럼 내려앉으면
쓸쓸히 골목길 돌아가는 넌
늘, 외로움에 젖어있는
나를 닮은
바람의 아이.
28. 햇살 푸른 날 // 최영희
이른 아침
창문을 열어 놓았어
베란다엔
오늘따라 많은 생각들이 다녀간다
음력 오월 단오
이맘때면
할아버지 기우제 올리시던 심정이
논바닥에 못자리처럼 간절했다지
가난이 목에 걸려
뱉어지지도 않던
시절도 있었어
하늘 때문만은 아니었어
오늘은 어찌
저번 날 지나온 허름한 골목
중고 책 서점에 쌓인 책들처럼
빛바랜 기억들이
내 창 밑
베란다를 이리도
들고 나는지
29. 회상 // 최영희
추억은
슬픔도
그리움으로 남는가
반디가
등에 걸
황 촛불 찾고 있을 때
그곳은
지금쯤
감 잎 파란 숲으로 있을 거야
앞산 뻐꾸기 울음소리
숲 속에 앉은 바람
폐부까지 서늘케 하면
소쩍이는 더 슬프고
산 허리 돌아
노을빛 어린 뺨 위에 물들면
아이야, 부르는
하얗게 피어나는
보리밥 익는 냄새
거친 손
어머닌 어디에 계십니까.
30. 고독 // 최영희
고독은 혼자 있어서가 아닙니다
스스로 혼자가 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어젯밤 내내
뒤척이는 바람소리
정신없이 달아올랐던
아스팔트의 열기도
차츰 싸늘히 식어갈 때쯤
신병처럼 도지는 고독
언제나
편린의 눈 끝에 선
날카로운 칼날은
나의 고독을 잘게 부수며
두어 칸 유리 상자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습니다
스스로
혼자가 되어 가는
난, 한참을
앓아야 합니다
창 밖의
가을 나뭇잎처럼.
31. 2005년 12월을 보내며 // 최영희
지금, 남쪽
어머니의 고향은 눈의 나라
쌓인 눈은 키를 넘고
제주에 유채꽃은
아직 깊은 잠을 자야겠다
지붕이 내려앉고
어른들의 한 숨소리
하얀 눈 송이송이 좋아라 던 아이들의
겨울 꿈은 무너지고
내려앉은 우리에
아기 갖은 엄마 소의 슬픈 눈
미처 배도 풀지 못했네
긴 겨울 밤
북으로 난 창은
바람에 흔들리고
어머니의 봄은
언제쯤일까.
32. 조가비 // 최영희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주워들었어요
그 텅 빈 가슴에서
왜 바닷소리가 들리는지
모르겠어요
파도에 밀리고 밀려
갯벌에 버려 질 때도
조가비는
바다를 가슴에 안았나 봐요
버리지 못하는
내 삶처럼
하얀
조가비 가슴에서
제 살 깎는
소리가 들려요
바다를 하나씩 버려야 하는
아픈 소리.
33. 하늘이 하도 맑아 // 최영희
하늘이 하도 맑아
구름 쫓아 가다 멈춘
아이적 놀던 곳
내 곁을 지나는 개미 한 마리
입에 문 까만 것
더 작은 풀꽃의 씨앗이란다
앙징맞은 입으로 물고 가던
풀 씨 한 알
톡 떨어져
흙에 숨는다
그때
숨긴
봄에 필 꿈처럼.
34. 하이에나
-서울 공원 하이에나 우리 앞에서
최영희
거친 들판 거친 삶 하이에나
내 삶도 그랬어
썩은 고기 한 점에
핏줄을 돌리고
먹구름 생의 위협으로 다가올 때
검은 숲은
너의 울음을 삼켰다
달리고 달린 지친 다리
어느 바위 밑 휴식을 취하던 때
너는 생각했으리
삶은 고통이라고
여기 무릎 꿇은 통한
유리창 밖 들판에 표랑 하는
제 울음소리에
목줄 세운 하이에나
거칠어진 숨을 몰아쉰다
달리고 달리고 싶은 하이에나
삶을 포박한
늙은 시간이여
창 밖 푸르름은
진정
고문이리라.
35. 기찻길 // 최영희
내게는 아픔으로 있는
기찻길
방금 초고속 열차가
바람같이 지나갔다
내 머리를 스친 생각보다
더 빠르게 달려간 기차
내게만 들리는 통증의 소리는
듣지 못했을 거다
평생토록 철길 위에서 젊음을 보낸
지금도 두드리고 있을 내 아버지는
오직, 한 길
가난한 선로수였다
21세기, 저 철길
그리고 초고속열차
역사(驛舍)를 나오는 사람들
내 아버지는
오직 저 철길 위
어둠의 시간만을 두드리다 가신
선로수였다.
36. 흔들리는 것에 대하여 // 최영희
밤에는 달빛이 흔들리더니
낮에는 하늘이,
오늘은
나뭇잎 따라 땅이 흔들린다
모스크바 광장의 붉은 깃발의 색깔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인터넷망을 따라 세계의 지축이
늘어졌다 댕겨졌다 한 눈에 들고 난다
쏘아올린 위성은 또
지구의 축을 흔든다
좁은 내 시야 문은 열리고
나를 가둔 나의 성이
흔들거린다
세상이 흔들거린다
빙빙 돌아간다
부서진다
혼돈의 나.
37. 후회
-저 세상 아버지께 // 최영희
그 해 가을
바람이
우리 집 앞마당 한 바퀴 돌아 나갈 때
당신의 등 뒤에 흐르는 외로움을 보았습니다
바람이
말라가는 나뭇가지 흔들고 지날 땐
당신 눈동자에서 쓸쓸함을 보았습니다
그 해, 바람이
당신의 야위어 가는 등 뒤를 밀어댈 때도
저는 당신의 손을 잡아주지 못했습니다
가을마다
이처럼 낙엽이 쏟아지는 건
때늦은 제 후회의 눈물입니다
날 사랑한 나의 아버지
아직도 귓결에 들리는,
얘야- 부르시던
당신의 음성.
38. 어머니의 강 // 최영희
달빛을 타고 흐르는
풀벌레 소리
그리움도 쌓이면
강이 되나 봅니다
꽃을 보면
당신의 슬픈 미소
오늘처럼
달빛마저 차갑게 느껴지는 밤이면
구름 속 먼 하늘
슬픈 당신이 계십니다
짧은 시간
잠깐 피었다 지는
꽃처럼 왔다 바람처럼 가버린
당신은
내 어머니
또 한번의 가을은 가고
머리에 하얀 눈발이 내려 않도록
그리움은 깊이도 알 수 없는
시퍼런 강물로 흐릅니다.
39. 찔레꽃 // 최영희
오래 된 아파트 담장 위
하얗게 핀 찔레꽃
어릴 때
너의 향에 취했던
기억
야트막한 산자락
네 발 밑 새순을 훔치려다
나보다 먼저
꽃뱀 한 마리 다녀간 흔적
알 수 없는 전율로 몸을 떨었지
꽃잎 밑에 숨긴
줄기마다 돋은 가시
그 땐 몰랐어
그 가신
꽃뱀 유혹의 배수진인 걸
찔레야
어쩌다 위험한 도시로 왔니
도시의 유혹은 꽃뱀보다 날카롭다
아-, 내 이마 위에 쏟아지는
저 순백의
상처받은 눈물이여.
40. 오월의 목마 // 최영희
사랑하는 사람이여
내 등에 안장을 둘러주오
체념하지 못한
젊은 날의 幻影(환영)
지난날
저 숲 속
안개처럼 내리는
오월의 비를 맞으며
사랑한다고 젊은 이 순간을 기억하자고
속삭이듯 말하던 그대 떠난 후
메말라 가는 가슴속
훠이 훠이
목에 하얀 힘줄 세우고
오월의 숲을 지나온
안개비를 맞는다
푸르러 오는 저 광야
그대 음성인 듯
귓결 스치는 푸른 바람
목마는 달리고 싶다
오월의
슬픈 목마여.
41. 오월의 아침 // 최영희
눈뜨면
아침상을 준비하리라
그대 마주할 식탁 위에
먼저 하얀 접시를 올리고
그 위엔 방금 솎아낸 상추를 씻어
푸르게 깔리라
그리고, 뒤뜰로 가
가지마다 조롱조롱 열려있는
앵두 몇 알 따다가
그 위에 올리리라
그리고
기도하리라
우리 이대로만
사랑하게.
42. 유월의 아침 // 최영희
부서지는 아침 햇살
하늘 내 나는 초록물결
그 대,
유월의 젊음이여
언제까지나 그대로
푸르러도 좋으리
풋풋한 향에 취해 비틀대는
그대로
그대로도 좋으리
숲에 들어
미칠 듯이 울어대는 새들의 발정도
신이 허락한 자유
내 미친 듯 거꾸로 선다 해도
유월이여
그대 그대로
푸르러 있어도
내 좋으리.
43. 아름다움에 대하여 // 최영희
눈물이 그리 아름다운지
몰랐습니다
아가의
두 볼에 흐르는
눈물
그것은
작은 육체의 목마름에 대한
무한히 맑은 영혼의 몸짓입니다
난, 오늘
그보다, 더
아름다운 눈물을 보았습니다
그리움은
쌓이고 쌓이면
정화된 물방울처럼
가슴속 깊은 곳에 옹달샘같이 맑은
눈물의 샘이 되나봅니다
여든여덟 살 아들이
가난한 세월을 살다 가신 어머님을
가슴으로 그리시는
스승 황금찬 시인님의 노안의
눈물,
난, 눈물이 그리도 아름답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44. 너와 나의 만남 // 최영희
많은 사람 중
너와 나의 만남
보이지 않는 진실이 있다
수 많은 음극과 양극의 전류 중
유독, 그 음극과 양극이 만나
하나의 전극을 만들어내듯
씨줄과 날줄이 어느 점에서 만나
하나의 작은 원을 이루듯
너와 나의 만남은
보이지 않는 운명 같은 선은 아니었을까
밤하늘 별들 끝없는 항해
어느 한 시간 속에서의 만남처럼
우리의 만남은
수업 겁 년 전부터 나고 지며 만나기를 거듭한
운명 같은 필연은 아닐까
우리, 가난한 삶이었지만
너와 나의 가슴에는
별들과의 만남 같은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지 않은가.
45. 찻잔 속 그리움 // 최영희
산속 찻집에서 처음 만난
녹차의 향기 같은
내게도 그런
푸른 시간이 있었지
탁자 위에 놓인
하얀 찻잔에 피어나는 연록의 향
또 하나의 나를 만난다
구릉지 돌아나온 너의 향기
나의 혼탁한 피를 맑히고
소녀야
넌 숲을 사랑한다고 했지
물 안개 촉촉이 내려앉는 곳
이 아침 여명에 맺힌 이슬을 보라
네 맑은 영혼이구나
하얀 찻잔에 젖어내린
그리움
그곳엔 내 잊을뻔한
한 소녀가 있다.
46. 우렁각시 // 최영희
새벽이다
나의
왕자님은
아직 고이 잠들어 계신다
잠이 깰까
부엌으로 간다
어릴 적
소꿉놀이하며
차리던 밥상처럼
식탁 위에
옹기종기 봄을 차린다
된장찌개. 냉이무침,,,,
난 우렁각시
당신은
영원한
나의 왕자님.
47. 아침 풀밭 // 최영희
어린 풀들의 미소가 천진 합니다
저 어린 풀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푸른 하늘엔
때론
먹구름도 오고
벽력 같은 천둥도 거센 비바람의 고통도 있다는 걸
바람이여,
고운 숨결로 손길로
저 어린 풀들의 미소 곁에
하루 웬 종일
머무르소서.
48. 아름다운 약속
-친구에게 보내는 시 // 최영희
사랑하는 나의 친구여
너의 눈빛은
슬프도록 아름다웠어
너의 눈은 말하고 있었지
처음 당신과 만나 약속했지요
이러지 마세요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쓰러지는 순간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
처음으로 실감했어요
자, 내 손을 잡고 일어나 보세요
한발, 한발 우리 다시
세상을 함께 걸어보는 거예요
보세요, 비바람에 쓸리고 발자국에 밟히어 쓰러진 풀잎들
태양을 향해 조금씩 일어나고 있잖아요
우리 그날의 약속 잊지 말아요
사랑하는 사람이여 내 손을 잡아요
내 손을 잡고 한발씩 떼어보는 거예요
그리고 함께 가는 거예요
사랑하는
나의 사람이여
친구여,
우리 그렇게 했지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약속
힘내요
나의 친구여.
49. 순을 닮았구나 // 최영희
아가야
너는
저 새로 돋는 순을 닮았구나
저 여린 잎
솜털 보송보송한
네 볼을 닮지 않았느냐
그 속에
하얀 핏줄 도는 소리
꼭, 네 심장 뛰는 소리구나
아가야
저 구릉지 산밭 연둣빛을 보아라
방금 목욕하고 나온 이슬같이
그것 또한
너를 닮지 않았느냐
물안개도 네 볼 부비듯
여린 잎을 안고 돈다
아가야
세상은 거칠다
네가 아는 세상처럼 그렇게 푸르지만은 않단다
때론 비바람 불고 매서운 서릿발도 친단다
저 여린 잎
비바람에 강했고
수많은 병충해와 싸워 이겼단다
여기, 녹차 한잔 속을 보아라
수고의 짙은 향을
우려 내듯
풀어내고 있지 않느냐.
50.시의 언어 // 최영희
아가야
너는 알고 있니,
아름다운 시어(詩語)를
너의 투명한 영혼으로 찾아낸
네 눈빛처럼 맑은 아름다운 소리
너에게 처음으로 불려진 이름
깊고 깊은 땅속에서 발아하여
맨 처음 햇살을 보는 씨앗처럼
너의 작은 입술을 통해
세상에 처음 나온 소리
네가 너만의 이름을 붙여주어
또 다른 의미의
꽃이 되고 나비가 된다
그 소리가
그 언어가
바로, 시의 언어다.
51. 새 해에는 // 최영희
저 산봉우리
솟아 오르는
바알간 태양
조금씩 떼어다가
꽃잎 조금 주고
풀잎 조금 주고
나머지는
아기 방 창가에 걸어두어
아가의 맑은 미소 보면
참 좋겠네.
51. 소리 없는 음성 // 최영희
1960년대
노래 부르기를 좋아한 한 젊은이가
있었네
당신은
청룡의 푸른 기상으로
조국을 사랑한
조국의 아들
아, 이 무슨 운명인가
낯선 이국 땅 전선에서 목소리를 잃었다는
당신
현충일이면 국립묘지 전우를 찾아
살아서 미안하다, 살아서 미안하다며 흘린
뜨거운 눈물
얼마인가요
오늘 님께서 내게 보내온
“사랑하는 시인” 이라는 음악
당신이 내게 목청껏 불러주고 싶은
노래지요?
님이시여,
난, 지금 당신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다
조국에 바친
당신의 가슴속 하고 싶은
벅찬 소리를
영혼의 소리를.
52. 내가 쓰는 편지 // 최영희
사랑은
보석처럼 빛나는 것도
눈물처럼 슬픈 것은 더욱 아닙니다
하늘과 땅 사이
흙 장미처럼
타오르는 듯한 사랑
바닷바람 한없이 저어대는 기러기의 날갯짓 같은
끝없는 사랑
영혼에 불꽃을 붙여 촛불처럼 타드는
영원한 사랑
너는 거기
그리고 난 여기
우리가 사랑할 세계는 언제나 이만치 있는 것을
하늘과 땅 사이
너와 내가 만나
깊은 산 바위가 스스로 탑을 이루듯
영원한 사랑의 탑
하나쯤 쌓을 수만 있다면
영혼이 재가 되어 세상에 뿌려진다 해도
우리들의 사랑 이야기
봄마다
마른 땅에 새순처럼 돋아 나는
사랑하나 되지 않을까.
53. 3월에는 // 최영희
어디고 떠나야겠다
제주에 유채꽃 향기
늘어진 마음 흔들어 놓으면
얕은 산자락 노란 산수유
봄을 재촉이고
들녘은 이랑마다
초록 눈
갯가에 버들개지 살이 오르는
삼월에는
어디고 나서야겠다
봄볕 성화에 견딜 수 없다.
54. 사월이 슬픈 건 // 최영희
사월이 슬픈건
그대, 하얀 빈자리 때문만은 아닙니다
별이 하나씩 사라지듯이
내 곁에 있던 소중한 것들이 사라져 가고
사라져 가는
텃밭 능금나무의 속으로 익는
능금 냄새라던가
무릎까지 치켜 올린
치마 밑 종아리까지 간지럽히던
앞 도랑 징검다리 짖궂은 물살이라던가
냇물에서 잡았던 물고기가
내 손에서 빠져나간 아쉬운
기억 때문만은 아닙니다
사월이,
사월이 슬픈건
눈부시게 푸른 저 햇살이
서러워서입니다.
55. 서리꽃 // 최영희
하얀
내 마음
그대의
차가운 눈빛
난
꽃으로 피네
하얀 서리꽃
어둠 속
푸른 빛
내 하얀 마음
더 맑으라 하네.
56. 9월,사과나무 아래에서 // 최영희
그 향기론열매에
키스,
내 목을 스치는 바람에취해
꿈꾸었다
발그스름한 그볼에,누군가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이 닿는다면
어쩔 수없이
눈부시도록 순결한 속살
보이고 말듯
그 깊은 곳
원초적 본능처럼 숨긴 씨앗 같은 비밀스러움
어느 황홀한 순간
가을빛에
농익은 가슴
내가 그랬듯
끝내
열리고야 말겠네.
57. 섬 // 최영희
바다
그곳
한 점떠있는
내 그리움이다
소금 꽃이 그렇게 피었다 져도
삭지 않는 그리움이다
파도가 야수처럼
그렇게 그렇게 집어삼키려도
삼켜지지 않는
뜨거운 내 그리움이다
하얀 기폭(旗幅)
올 듯한
그리운 사람
천년
기다린다
나
섬
되어.
58. 그대가 그리운날 // 최영희
오늘은 당신의 창을
열어봐 주세요
당신의 창가에 부서져 내린
내 그리움
얼마나 마른 풀잎을 적셔 냈는지
풀잎이 누운 자릴 보아 주세요
보고픈 마음
얼마나 그대 창가를 서성이다
돌아갔는지
당신이 잠든 밤
별빛처럼 추녀 끝에 그리움 내려놓고
보풀린 와인 한 잔에 마음 적시는
오늘,
그대가 몹시도
그리운 날입니다.
59.봄 길.1 // 최영희
얼마나 돌아온 길인가
메마른 숲길을 지나
서글픈 바람 속에서
발 밑에 떨어져 쓸려간
낙엽을 기억한다
고뇌의 긴 그림자
땅을 비집고 파고드는
삶의 고뇌 속에
아팠던 시간 누이고
봄이 오는 길을 걷는다
남녘에서 오는 꽃향기에
철없는 민들레 풀섶마다 내려앉고
논두렁, 밭두렁엔
국수댕이, 냉이, 봄쑥이 지절대는
참으로
오랜만에 걸어보는
이 봄길
나비야 춤추어라
나의 사랑한 기억
봄의 왈츠를 타고있다.
60. 봄.2 // 최영희
봄은 또 오고 있다
발정기 암고양이
실눈 사이로
바람에
햇살 나붓거리며
언덕을 넘고 있다
꽃망울 터지는 소리에
버들치 꼬리는 치켜 오르고
얼음을 풀어내는
젖내나는 여울물 소리
대지大地는 가슴을 연다
어쩌나
봄은 또 오는데
내게 남은
불씨 하나
어디에다 피워낼까
봄이 오는 소리
내 심장
자꾸만 두드리는데.
61.봄 비.1 // 최영희
눈물 같아라
풀잎만 같던
가슴
젖어 내린다
투망에 건져진
빛바랜
그리움
무채색 기억속에
한 점씩 번져가는
푸르름
봄비는
내 하얀 신경세포를자극하여
또 한 번
덤불 속에 잠든
사랑한 내 기억의숲을
흔들고있다.
62.봄 비.2 // 최영희
이른 아침
봄비가 창문을 두드린다
그 소리에
먼저
풀밭에 어린 싹이
발딱 일어나 걸어 나온다.
63.빈자리 // 최영희
유월 어느 날
꽃잎이 피었던 자리가
비어 있네요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때
내 친구 수야가,
그리고 어머님이 떠나실 땐
더 그랬어요
점점 푸르러 오는
그리움
채워지지 않는
가슴 속
빈자리
다시 꽃이 피면
채워지려나.
64.바람아
-어는 시인의 아픔을 보고 // 최영희
스치는 바람아
너는
알고 있지
슬픔 위에 슬픔을
더한다 해도
영영 무지개 뜨지 않을
언덕, 그 언덕에
사랑하는 이 보낸
슬픔만 할까
메아리 없이 돌아오는
그 소리만 할까
여기. 사랑하는 이 보낸 슬픔
가시기도 전
또 다시 한 점 혈육의
스러져 가는 아들의 눈빛을 잡고 아파하는
시인이 있다
바람아
너는 알고 있지
사랑을 노래하던 한 시인의
별빛 머금은 물고기의 눈빛보다
더 깊게 젖어드는
슬픔을.
65.비 오는 새벽여섯시 // 최영희
어둠 짙은
새벽 여섯시
비가 내린다
거리의 불빛
밤새 비에 젖어
슬픈 별처럼 깜박인다
바람이 나의 작은 창을 흔들고지난다
내게 입맞춤한 차가운 시간
이렇게 지나고 있다
가슴에 맺혔던 말
하나하나 새겨 놓았던
나의 별들아
비 오는 새벽
저 젖은 불빛처럼
깜박이고 있을 너
이젠 슬픔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내가 어릴 적
사랑한 별들아
이제는 슬픔 아닌 고운 빛으로띄우리라
그땐 고요히 물결 이는
밤바다에 내려와
어미 잃은 슬픈 물고기의 꿈이 되면
좋겠다.
66. 비 오는날 // 최영희
내 창을 흘러내리는
저 빗소린
누구의 가슴을
쓸어내리는 소리입니까
설움의 무게
이기지 못해
아래로 아래로 흐르는 저 서러운소리는
어느 영혼의
슬픈 노래입니까
오늘따라
검은 줄 타는 비파의 젖은 소리처럼
유리창에 제 몸을 파편처럼 부수며 떨어지는 빗물은
홀로 허공을 떠돌다 떠돌다 추락하는
외로움에 지친
서러운 몸짓.
67. 동백섬 // 최영희
뱃길 따라가다
해금강
그냥 갈 수 없어라
댕기 땋아 내린
언니가 있을 듯
동백섬 올라보니
백년 송, 대숲 산새소리
동백꽃은
또 얼마나 울었을까
사월 지나 오월
올해도 기다리던
그리운 사람 오지 않고
고독만큼 깊은 솔숲
동백이 흘린
눈물일까
잊혀진 내 사랑보다
붉구나.
68.두 마리새 // 최영희
새가 날아간다
봄날 한강 둔치
물 흐르는 곳을 향해
두 마리 새가 날고 있다
조금 앞선 한 마리 새 뒤에
또 한 마리,
빈 하늘
총총,,,
구름 물든
서쪽, 서쪽으로 간다
고향 찾아가는 걸까
내 시야에
보이지 않을 때까지
함께 날고 있는
두 마리 새
추운 겨울
한강 어느 둔치
둘이는 힘든 먹이를 낚으며
삶에 대해 많은 이야길
나누었으리라
새가 날아간
빈 하늘가
내 곁엔 여기까지 함께 온
그 사람이 있다.
69.들꽃 같은 여인 // 최영희
그대에게 난
들꽃 같은 여인이 되리라
바람 따라 오는 산새소리
가슴에 담으며
아침마다 햇살에 부서져 내리는 이슬처럼
슬픈 사랑
그래도 난
시인같이 오시는
그대를 기다리리라
양지쪽
바람 불어오면
시린 가슴 위로하는
그대 음성으로
알리라
아침에 떠올랐던
해님, 서산에 걸터앉아
쉬어가는 시간엔
당신의 그림자 밑이라도
젖은 가슴 내리는
들꽃 같은 여인
날마다 그대 고운 눈빛 그리며
들에 산에 피는
들꽃 같은 여인이 되리라
내가 죽도록
사랑할사람이여.
70. 낙엽 // 최영희
얼마나 고왔던 시간인가
향기롭다
이제 놓아야 하는
애처로운 생의 한 끝
햇살의 엷은 미소
마지막 흐르던 체온마저
싸늘히 식어감을
넌 슬퍼하지 않는구나
고뇌하고 살았던
아름다운 삶이여
시리도록 차가운 바람의 시선 끝에
날아 내리는 처연한 몸짓
이 순간 넌
생生의 마지막 불꽃에 날아드는
나의 나비
낙엽이여
난 지금 너를 보고있다
나도 알 수 없는
나의 슬픈 눈
이 세상 모두를 사랑한 너의
처음에로의
입맞춤.
71.내가 당신을 아직도 사랑하는 이유는 // 최영희
내가 아직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 눈 속에
난 아직 고운 소녀로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아직
내게 처음 손을 잡아준
그 떨림으로 있습니다
내가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내 살아온 날의 모두를
함께, 기억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만으론 아무것도 기억할 게 없습니다
슬펐던 기억도
아름다웠던 기억도
내가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는 이유는
당신은 곧 나의삶이요
우리는
이, 늙어가고 있는 모습마저도
서로가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72. 나비 // 최영희
나비가
여행을 떠난다
바닷빛보다 푸른 하늘
얇은 어깨
하늘을 나는 날갯짓
나비의 날개가 시리다
빈 꽃대의 말 없음과
풀잎에 맺힌 눈물
쓸쓸한 가을여행
저문 저녁 길
접어야 하는 날개
내 가슴속으로 날아든
깊은 눈에 담긴 사색思索의 빛
나비의 눈 속
빈 하늘이 깊다.
73. 그 섬에는 // 최영희
남해 끝 동백섬
서른 세 명이 살고 있는
지심도
자꾸 그 섬이 생각이 난다
민박집 주인아주머니
한 예순 살쯤 되셨을까?
스무 살에 그 섬으로 시집을 왔단다
아들딸 낳아 모두 육지로 내 보내고
지금도 그 섬을 지키고 있다
섬에 들어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다는
아주머니
그 섬에는 아주머니의 육지에 대한
그리움만큼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있었다
손을 내밀면 닿을 듯한
동백 섬, 지심도(只心島)
그 섬에는 지금도
한 여자가, 어머니가
동백 꽃잎 같은 삶을
지우고 있다.
74. 코스모스 연가 // 최영희
한강 변
물빛에 잠긴 코스모스
제 모습이
섧다
스치고 간 바람
정情인 줄, 잠시 머물다 간 햇살
사랑인 줄 알고
먼 하늘만 바라는 눈빛
차라리 슬픔이구나
강물 따라 바다로 가는 바람
목마름으로 타오르던 그리움
체념처럼 한 잎씩 허공에 날고
노을 속 저 만치
가을이
다하지 못한 사랑이
가고 있다.
75. 겨울 강 // 최영희
흐르는 물결로만
그 아픔의 깊이를 알 수 있을까
핏기 마른 억새풀
쉰 소리로 우는 날
물안개 설움인 듯
소복으로 내려앉고
외로운 검은 강은
은빛 슬픈 별을 삼킨다
오늘따라
물고기의 푸른 눈은
더욱 어리고
철없는
천둥오리
가슴 속을 파고든다.
76. 행복 // 최영희
행복은 어떤 것일까
어느 전설 같은 삶을 살던 어떤 사람은
구름 속 이슬 머금은 꽃잎처럼 하늘을 날아
어디론가 가버리고
아름다운 왕궁 속같이만 보이던 곳의 소녀는
하얀 백장미 한 송이 입에 물고
별의 나라를 찾아갔다네
슬픔이었네
행복이 어떤 모습인지
아직 모르겠네
지하철 입구
두 다리가 없는 걸인
일그러진 냄비 앞에 놓고 엎드려 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은사람
하늘에까지 들릴까
성가를 부르고 있네요
미소 띤 얼굴
그는 나의 슬픈 눈빛을
허락하지 않았네
난, 아직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겠네
하늘에서 내리는 눈,
저 가난한 천사의 눈빛처럼
내 마음에 눈(目) 맑아지면
행복이 보일까?
77. 그리움 // 최영희
창문을 연다
아이 적 우리 집 뒷산
큰 나무 위에는
산새들이 집을 짓고
저들만의 언어로 노래를 하곤 했다
때론 슬픈 노래
또 어느 땐 맑은소리로 사랑을
그 소린
혼자 있는 내 창가에까지 들리곤 했다
지금 들릴 듯한
영혼을 맑히던
소리, 그 소릴 찾아
13층 아파트 창가에 선다
그러나 내 시선은 새들이 떠나고 난
빈 둥지 같은 회색빛 아파트건물의
사각창에 머물다
돌아선다.
78.염려(念慮) // 최영희
벌써
봄 오는데
산사과나무
지난해 열매
조롱조롱 잡고 있네
놓지 못 하네
사랑한 기억 털지 못하네
봄 햇살
창(窓)가엔
아기들 웃음소리
들리는데.
-2006년 3월 20일 발행 -도서출판 오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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